엄청난 분량에도 오탈자가 없고 글씨체가 동일하게 완벽하고 경이로운 문화유산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사진=KBS2)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사진=KBS2)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 ) 국내에서 한국학 자료를 디지털 자료로 구축하는 작업이 정부 주도로 2000년 이후 진행됐다. 그동안 소중한 한국학 자료들이 디지털화돼 일반인이 손쉽게 볼 수 있고, 자료의 영구적 보존도 가능하게 됐다. 조선시대 역사문화콘텐츠의 대표적인 보고인 조선왕조실록도 2005년에 온라인화 작업을 시작해서 2015년에 향상된 최신 기능의 웹서비스로 완성됐다. 또 다른 대표적인 한국학 자료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일명 팔만대장경이 있다. 막대한 분량과 판각 자료라는 어려움 때문에 그동안 디지털화를 엄두 내지 못했다. 이 팔만대장경의 디지털화 작업이 내년부터 시작된다.  

문화재청은 팔만대장경을 디지털 데이터베이스화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한다고 지난 18일에 밝혔다. 팔만대장경 디지털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은 정밀한 기술이 필요하다. 8만여 장에 달하는 경판을 정밀 기록하고 보존상태 파악 등의 기초학술 조사를 시작한다. 그 후 경판을 정밀 사진 촬영하고 전통방식의 인경본(印經本)을 제작한다. 인경본은 판각에 먹을 묻혀 한지에 인쇄하는 것을 말한다. 인경본 제작 후 스캔작업을 해서 2025년부터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2025년부터 인터넷으로 열람 가능

팔만대장경 디지털화 작업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해인사 자문회의 보고자료'에 따르면 이미 2009년에 디지털화 작업을 기획했다. 해인사는 2009년 5월 18일부터 2010년 2월까지 '팔만대장경 경판, 판전, 판가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기초작업/3차원 영상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1차 사업도 마무리했다. 이것이 이번 작업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해인사의 작업과 내년부터 진행될 문화재청의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업이 완성되면 학자들은 경판의 이미지를 실물 크기로 화면에서 볼 수 있다. 해제는 물론이고 실물과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를 찾아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유네스코에서는 2007년 팔만대장경판과 그 경판을 봉안한 대장경판전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해서 보존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는데, 디지털화 작업으로 경판 및 경판전은 일반 이용자와 분리되어 보존환경이 더욱 좋아지는 것이다. 일반 이용자는 팔만대장경을 온라인에서 3D영상으로도 볼 수 있고, 문서로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문화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규모로만 유물의 가치를 따지는 건 문제가 있지만 팔만대장경의 규모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 8월에 몽골군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지고 고종 23년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한 후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 동안 판각해 조성된 것이 총 1514경(종) 8만 1350판이다. 이 중 대장도감판이 7만 2610판이고 분사대장도감판이 8632판이다. 이 많은 분량에도 오탈자가 없고 글씨체가 동일하게 완벽하다는 것을 경이로움으로 여긴다. 

팔만대장경은 무엇인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불교 경전의 총서인 대장경을 총 8만 1258장의 나무판에 판각한 것이다. 고려 초기는 북방의 이민족인 거란족과 몽골군이 세력을 강화하던 국제혼란의 시기였다. 거란족과 몽골은 중국의 배후인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시로 침입했고 이는 고려에게 가장 큰 국난이었다. 이에 고려 8대 왕 현종은 민심을 결집시키고 불교의 힘을 빌려 국난을 극복하고자 대규모 불사를 벌였다. 개경 인근에 사찰을 창건하고 당시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고려의 인쇄술을 이용해 대장경을 만들었다. 1011년 시작해서 1031년에 완성했다. 문종 때 이를 다시 경판으로 새겨서 1087년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대장경을 초조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이후 역사 속에서 대장경은 많은 간난고초를 겪기 때문이다. 초조대장경은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고려 정부는 몽골의 병화를 피해 1232년 6월에 강화로 천도를 했다. 그해 10월에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는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을 다시 조성할 것을 구상했다. 대장경 조성의 동기는 고종 24년(1237년)에 쓴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현종 때 판각되어 대구 부인사에 소장 중인 대장경판이 소실되어 재상과 문무백관이 함께 큰 서원을 발하여 각성사업을 착수했다는 것과 재장경판 사업의 재개는 반몽항쟁의 일환임을 천명"하고 있어 대장경 재복원 작업이 전쟁 극복의 기원임을 알 수 있다. 

해인사 폭격 명령 거부했던 김영환 대령 일화

팔만대장경 복원 작업의 과정은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과 고려사 고종 38년(1251년) 9월에 기록되어 있다. 고종 23년에 대장경의 판각업무를 맡아보는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다음 해부터 각판을 시작해 16년 뒤인 고종 38년에 마친 것으로 나와 있다. 대장경은 그 이후로도 몇 차례 역사적 고초를 겪지만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한국전쟁 때 생겼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던 인민군 900여 명이 해인사에 숨었다. 유엔군 사령부는 해인사를 폭격하라고 명령했지만 공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이 우리 문화유산을 불태울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이를 비로소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은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일이 된다.  [팝콘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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