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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뉴스=김재용 기자)조선시대 실질적인 마지막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이 임종하자마자 새 정권은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시작했다. 1801년 신유박해였다. 천주교 탄압의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당시 주류 지배층은 천주교 확산이 성리학적 통치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실용적 사상을 추구하고자 했던 정조의 지지 세력인 남인과 진보 지식인 그룹들이 대부분 천주교를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탄압을 명분으로 한 정치적 숙청이기도 했다. 당시 정치적 주류 세력은 개혁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정순왕후가 대변하고 있었다. 정순왕후는 순조 대신 섭정을 하던 영조의 계비였다. 물론 정조도 사회적 주류 질서를 무시할 수 없기에 천주교를 탄압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조는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었고, 자신의 지지 세력이 대부분 천주교와 관련 있었기에 천주교 탄압은 비교적 소극적으로 진행됐다.

19세기 천주교 박해의 시작, 신유박해

천주교인들의 급격한 문화적 진보의 태도가 일반 민중의 정서를 거스른 점도 천주교 박해의 하나의 원인이다. 유교적 질서가 깊게 박혀 있던 당시 사회에서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고 남녀가 같은 방에서 예배를 보거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관점에서 어른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은 점이 비단 지배층뿐 아니라 민중의 정서에도 어울리진 않았다. 실제로 당시 보수 개혁적 지식인이었던 안정복의 일기 기록에 의하면, 그는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적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한참 어린 천주교인이 자신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경험한 이후로 천주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돌아섰다고 한다. 개혁적이긴 했지만 보수적 유학자였던 안정복은 그들의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천주교 박해의 정서를 이를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당시 천주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진보적인 사람들이었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 기복신앙의 차원에서 믿는 사람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신유박해로 인해서 수백 명이 처형당하고 유배를 갔다. 당시 천주교의 중심인물은 명문가 집안의 자제였던 28세 황사영이었다. 황사영을 잡아야 박해가 끝난다고 할 정도였다. 황사영은 충북 제천 근우면 배론리의 한 토굴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8개월을 숨어 살면서 교우들이 처형되는 소식을 들었다. 배론 토굴의 초기 모습에 대해서는 '주론토굴답사기(舟論土窟踏査記)'라는 책에 나와 있다. 이 책은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가 1936년에 배론을 답사하고 쓴 글이다.

"제천에서 9킬로미터의 봉양면 주포에 이르러 여기서 8킬로미터, 도보로 약 두 시간 거리에 배론 내를 건너 계속으로 접어든다. ….계곡은 길이가 4킬로미터에 이르고 지형이 배 모양이어서 배론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4번지 최재현 씨 댁 뒤란에 있다. 토굴의 지름은 약 1미터 반, 양쪽을 돌로 쌓아 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정을 꾸몄다."

좁은 토굴에서 교우들의 참혹한 죽음의 소식을 접하다

황사영의 심정은 참혹했을 것이다. 잡히면 자신도 죽음을 면치 못하거니와 동료들의 죽음 소식을 들으면서 지옥에 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 지옥을 벗어날 방법은 하느님 밖에는 없었다. 그에게는 조선이라는 닫힌 세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상의 질서를 벗어나 만인을 구제해주는 하느님의 질서가 중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좁은 토굴 안에서 그는 종이에 쓴 글자를 반 자짜리 명주 천에 정성을 다해 옮겨적었다.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올이 가는 명주 천에 깨알같이 적어나간 글의 숫자는 1만 3384자다. 북경의 주교에게 전달하려면 옷 속에 넣어야 했기에 글씨는 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9월 25일에 그를 돌봐주던 황심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체포되었다. 그가 고문 끝에 황사영이 숨은 곳을 알렸다. 황사영의 은신처를 알고 있던 사람은 황심뿐이었다. 은신 8개월 만인 9월 29일 제천 토굴에서 체포됐다. 황사영이 쓴 백서의 앞쪽에는 자신들이 조선 정부에 의해서 어떤 탄압을 받았는지 적었고, 순교자들의 전기를 하나하나 적었다. 이들의 순교 사실을 조선 교회에 대한 역사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글의 끝 쪽에 북경 주교에게 요청한 사항이 적혀 있었다. 교황이 중국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조선 국왕을 협박하고, 청나라가 조선을 부마의 나라로 삼아 내정을 감독해달라는 것이었다. 수백 척의 서양 선박에 수만 명의 군대를 끌고 와 조선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달라고 요청한 내용이 있었다.

이 편지로 인해 천주교도들은 나라를 전복시키는 역모 집단으로 변했다. 이 내용은 19세기 내내 두고두고 천주교 박해의 근거가 되었다. 황사영 백서로 인해 천주교는 국가 전복 세력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하지만 후에 연구에 의하면 실제 원본에 비해서 소위 '가백서'가 원본을 훼손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가백서는 신유박해 때 처형당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을 중국 황제에게 알리고자 원본을 옮겨적은 백서를 말한다. 이때 조선 조정은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인 줄 몰랐다고 변명하고, 이들의 조선에서의 행각이 너무 심했다는 것으로 변명하기 위해서 사실을 과장해서 옮겨적은 것이다. 후에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논란이 된 것이 이 가백서이다.

황사영 백서를 비난할 수 있을까?

가백서의 경우 앞뒤 맥락을 빼고 극단적인 내용만 편집한 것이다. 내용이 너무 극단적이었기에 조정 관료들도 이게 원본의 내용 그대로인지 의심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백서 내용 중에 '서양 선박을 끌고 와 달라'는 대박청래(大舶請來) 요청 내용은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황사영의 독자적 생각은 아니다. 1796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북경에 보낸 편지에서 최초로 나오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정감록' 신앙과 결합해 해도인진설(海島眞人)로 확장되던 민간 신앙이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서사가 내포되어 있다. 즉 '바다 건너의 진인이 조선을 구한다'의 정감록 예언 대상이 서양 선박으로 바뀐 것뿐이다. 즉 황사영의 백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쓴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지금까지도 황사영의 백서 내용을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 황사영이 죽을 짓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국가는 지금의 국가와는 다르다.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보다 가렴주구와 지배층의 탄압으로 민중이 도탄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다. 그런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광적인 폭력 앞에서 오직 종교를 믿을 권리를 요청한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고도서

정민,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김영사, 2022

샤를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여진천, <황사영 백서 이본에 대한 비교 연구>, 원주교구문화영성연구소, 2017[팝콘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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