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 통일 주장하며 북한 공산정권의 군비확장을 초래해

▲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쟁 기념공원(사진=픽사베이)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한국전쟁은 한국인의 심성을 '위기 심성'이라는 상태로 바꾸어놓았다는 말이 있다. 즉 항상 전쟁 속에서 살 듯이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생존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국 경제 성공의 중요한 기반이 된 일벌레 한국인을 한국전쟁이 만들어 놓았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를 뒤엎어 놓았다. 조선왕조와 연결되어 있던 기존의 전근대적 계급 관계를 해체해버림으로써 진공상태에 놓여버린 상위 계급의 자리를 놓고 평범한 사람들이 치열하게 경쟁해 획득하도록 했다. 모든 사람이 누구나 치열하게 노력하면 나도 저 자리를 획득할 수(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치를 내면화시킨 것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체질을 사적 경쟁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한국인을 치열한 생존경쟁 동물로 만든 한국전쟁

하지만 한국전쟁은 한국인의 심성에 이렇게 긍정적인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합리성과 도덕성보다는 '눈치'와 '줄서기' 등의 전근대적인 생존 게임을 최고의 가치로 만들었다. 한국 사회의 과도한 사적 생존경쟁, 정부와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 과도한 물질만능주의, 가족이기주의, 이기적 개인주의가 이 '전쟁의 위기 심성'에 비롯되었다는 사회학자들의 말은 타당성이 있다. 이것이 전근대적 타성에 젖어있던 한국인을 자본주의적 체제에 익숙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너무 '급속하고 잔인하게' 진행되었기에 그 대가를 너무 뼈아프게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의 긍정적인 면을 논하기에는 한국전쟁은 너무 잔인했다고 전쟁학자들은 말한다. 한국전쟁이 유난히 잔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민족상잔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서로 형 동생 하면서 지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어떤 이념에 경도되어 알고 지내던 이웃을 잡아서 죽이는 모습을 지켜볼 때 그것은 이방인이 쳐들어와서 죽임을 당하는 것과는 정서적 충격이 다르다. 배신감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어떻게 네가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 정서는 극도의 분노를 유발한다. 한국전쟁은 그래서 세계사적으로도 아주 잔인했던 전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그동안 골육상쟁(骨肉相爭)의 학살을 초래한 북한의 지도자를 증오하는 법을 배웠다. 물론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은 김일성이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을까? 오히려 북한과의 긴장 분위기를 자기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면이 없었을까? 자유주의 진영을 지켰다며 이승만을 영웅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 전에 이승만이 한국전쟁 발발에 어떠한 책임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생 경제 파탄에도 북진 통일만 떠들어

1950년 초반부터 서울의 쌀값이 6주 동안 두 배로 오르는 등 물가 폭등으로 서민 경제는 파탄 나고 있었다. 지금처럼 쌀이 없으면 빵 먹으면 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당시 쌀은 한국인에게 생명줄이었다. 굶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서민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지만 오히려 정부는 북진 통일만 떠들었다. 사회 불안을 북진 통일론으로 호도해 자신의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고 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국방부 장관 신성모의 입을 빌려 기회만 되면 "실지 회복을 위한 모든 준비는 다 되어 있으므로 다만 (북진)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런 전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목소리만 높인 이승만 정부의 이런 허장성세는 미국이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애치슨 선언이란 1950년 1월 당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국을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을 말한다. 애치슨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을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한다고 선언했는데, 바로 이것이 북한을 오판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이번 기회에 한국을 침공하면 미국의 지원이 없으리라 판단하게 한 것이다.

고려대 정치학 교수이자 한국국제정치학회장이었던 고(故) 이호재 교수는 '한국외교정책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책에서 이것을 이승만의 실속 없는 허세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돌발 그 자체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공갈 정책이 실패한 결과라고 할 정도로 그의 무력 통일 공갈은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무력으로 통일하겠다고 허세를 부림으로써 국내외에서는 그의 실력과 의도에 관해 많은 오해를 하게 되었다. 국내의 많은 사람이 이승만과 그의 정권이 북한에 비해 우월한 힘을 갖고 있거나 적어도 자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 박사에게 더욱더 무기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 북한에 비해 군사력에 있어 열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무기만 주면 대통령과 그의 군대가 38선을 넘어 북진할 것을 우려해 그에게 무기를 공급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못지않게 이승만의 공갈 정책의 결과는 이승만의 위협이 실현되어 한국군이 북진할 때를 대비해서 김일성과 그의 북한 공산정권이 더욱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쟁 2시간 전까지 술판, 춤판이었던 한국군 수뇌부들

남침을 한 북한은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히려 자위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논리로 한국전쟁 가해자의 책임을 회피해 왔다. 어쩌면 북한의 이런 논리는 가공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바로 이승만 정권의 이런 공갈이 그들의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북한은 그동안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해온 반면, 남한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대한 미국의 견제로 인해 전쟁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침공 당시 북한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였고, 한국군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 명뿐이었다. 북한 소련제 탱크 240여 대, 아크 전투기와 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한국군은 6대의 항공기 이외에는 거의 전무했다.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사령관으로 유명했던 채명신 장군은 그의 한국전쟁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북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고 보고했지만, 군 수뇌부는 그날 비상경계를 해제했다. 24일 저녁 육군본부 장교클럽 낙성파티에서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참여해 새벽 2시까지 밤새 술판과 춤판이 벌어졌다. 전쟁이 발발하기 2시간 전이었다."[팝콘뉴스]

참고자료

<한국전쟁사 제3권>, 전쟁기념사업회, 행림출판사, 1992

<한국외교정책의 이상과 현실>, 이호재, 법문사, 2000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매일경제신문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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