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이반 일리치의 죽음, 현대인의 외로움 그 근원

성공과 돈만 추구하는 현대인의 허위적인 삶
청년들은 허위적인 삶에 저항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야

김재용 기자 | 기사입력 2021/11/03 [10:46]

[기자수첩] 이반 일리치의 죽음, 현대인의 외로움 그 근원

성공과 돈만 추구하는 현대인의 허위적인 삶
청년들은 허위적인 삶에 저항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야

김재용 기자 | 입력 : 2021/11/03 [10:46]

▲ (사진=픽사베이)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당시 러시아 상류층 사회 사람들의 허위적인 삶을 비판하는 소설이지만, 지금 우리가 읽기에도 더없이 좋은 소설이다. 현대인의 허위적인 삶의 묘사에 딱 들어맞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어렸을 때부터 상류층 사회의 정해진 길을 밟은 후 판사가 됐다. 그 과정은 기계적이었고 삶의 의미를 향한 고뇌나 성찰 따위는 없었다. 아버지가 그랬듯 판사가 되어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판사 업무는 온전히 '사무적'이었다. 자신의 판결로 인해 한 개인이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을 것인지, 타인의 삶이 어떠한 격동을 겪을 것인지에 대한 공감이나 고뇌는 없었다. 그런 감정에 치우치는 일은 그에겐 무의미했다. 이반 일리치는 이번 달 법원 승진자 명단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징역 선고를 내린 후 오늘 저녁 식사는 어떤 메뉴를 선택할지가 그에겐 더 중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말기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대로 치료도 못 하면서 돈만 받아가는 그의 무능한 주치의와 자신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오직 옷 쇼핑에만 관심을 두는 아내와 딸을 보면서 초기에는 분노하지만, 점점 삶을 초탈하면서 허위의 껍질을 벗어버리게 된다.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허위적인 삶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인간에게 정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의미 없는 삶을 살았는지 되묻는다. 그 과정에서 이반 일리치는 극도의 외로움을 느낀다. 사람들이 그동안 자신에게 친절하고 잘 해준 이유는 모두 자신이 가진 사회적 지위, 권력, 즉 자신이 사회 속에서 지닌 값어치, 자원, 수단적 가치 때문이었지 자신이라는 인간 그 자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풍족하게 사는 상류사회 사람들은 계산적인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경험한 주변 사람들은 현대인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사람들은 타인의 즐거움을 공유하면서 거기서 오는 자신의 이득을 계산하지,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진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어루만져주고 진심으로 같이 아파하는 것은 자기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오히려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다.

 

"얼굴을 등받이 쪽을 향한 채 소파에 누워 지내는 동안 그의 외로움은 지독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시 한복판에서, 그리고 수많은 지인들과 정말 가까운 가족들 옆에서 느끼는 외로움이었고, 바다 깊은 곳이라도 땅속 깊이라도, 이 세상 어느 곳이라도 그보다 더 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외로움이었다." _ '이반 일리치의 죽음' 본문에서

 

이반 일리치는 마지막으로 오직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고통을 위로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하류 계층 출신 하인의 인간적인 손길을 느끼면서 숨을 거둔다. 이반 일리치가 숨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직장 동료들은 그의 죽음에 슬퍼하기는커녕 곧바로 경쟁자 한 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현대인은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 등을 통해서 수많은 인간관계를 맺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계속 외로움을 호소한다. 수많은 커뮤니티 활동으로 외로움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저기 커뮤니티 활동에 더욱 기웃거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외로움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가 죽기 직전에 깨달은 것을 현대인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적인 외로움이 해소되려면 진심으로 타인의 존재 그 자체와 깊이 있는 '맺음'을 가져야 한다. 맺음을 위해서는 타인을 수단적 가치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한 인간으로서의 순수성, 그 자체로 좋아하고 존중해야 한다.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현대인의 모습이다. 현대인에게 타인은 그냥 정보는 얻는 수단, 자신의 이득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커뮤니티를 채우고 있는 나의 아이콘이 어느 날 사라진다 해도 사람들은 그 사라짐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 사라짐이 나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냥 "어 그래?"라는 한마디만 할 것이다. 아니 차라리 이런 한마디라도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타인이란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과한 현대 사회 속에서, 현대인의 외로움은 더욱 심해지면, 심해졌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청년들일수록 사회적 성공이나 지위 상승에 대한 압박을 받으면서 진정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 간 경쟁과 지위 상승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청년들은 원자화되고 고독은 최대 문제로 부상했다. 최근 5년간 청년 고독사를 포함해서 청년 정신 질환 급증했다는 통계청 발표가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당장 청년을 위한 혁명적인 정책이 도입돼서 청년의 삶의 조건이 갑자기 바뀌면 좋겠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점점 팽배해지는 물질주의 사회 속에서 청년들은 저항해야 한다. 그 저항은 이반 일리치처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으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삶의 자존감을 회복하면 외로움 속에서 의미 없이 사는 모습이 줄어든다. 그럼 청년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심리학자 토마스 펠런(Thomas W. Phelan)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느껴질 때 흐뭇한 기분이 든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알아봐 주거나 인정해주면 뿌듯해지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런 시도를 아예 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러운 자존감 강화제를 접할 기회마저 잃고 있다."

 

토마스 펠런의 말은 어떤 식으로든 타인을 도와주면서 살 때 사람은 뿌듯한 자존감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가 사회적 쓸모에 의해 평가될 수밖에 없다면, 과도한 경쟁주의에 휩쓸려서 외로움 속에서 허우적대며 자존감을 상실할 게 아니라,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자신만의 특별한 강점을 찾아서 자존감의 가치를 회복해 보면 어떨까? 만약 이반 일리치가 자신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사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 사용했다면 그가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고독사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참고자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강은(옮긴이), 창비, 2012

토마스 W. 펠런, 『아이의 자존감 혁명』, 문세원(옮긴이), 국민출판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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