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감은 범죄의 주요 원인이 될 정도로 인간 영혼에 상처를 줘
모욕평화주의의 실천으로 자신을 보호해보자

▲ (사진=픽사베이)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이런 유명한 제목의 에세이집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 문구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지질하고, 소심한 사람을 조롱하며 마음을 좀 넓게 가지라고 말할 때 종종 빗대어 사용한다. 하지만 사람이 작은 일에 분개하는 것은 지질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심리적으로 '나'라는 자아의 정체성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특질이 두드러져서 보일 때 스스로 자각한다. 나만의 특질은 집단에 묻히면 익명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나만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사라지고 집단의 정체성만 남는다. 즉, 집단에 묻히면 익명의 내가 되고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속한 타인들의 일반적인 정체성과 섞인다. 그러면 이미 나는 내가 아닌 것이 된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말대로 일반의지(공동의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거대 담론, 거대 이념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큰일과 관련해서는 사람은 잘 분개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는 내가 아니고 집단과 관련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 개인만이 아니라 소속감에 묻혔을 때, 즉 남도 그렇다고 느낄 때는 모욕이나 비난을 받아도 별로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담론, 작은 일'은 집단을 벗어나서 개인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내가 어떤 사람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불친절하게 대한다거나, 잘 아는 관계도 아닌데(또는 잘 아는 관계) 쉽게 내게 모욕을 주거나 비난한다거나, 나를 배려하지 않고 나만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한다거나 하는 행동은 주로 작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작은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만의 정체성이 그대로 남에게 노출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개인은 모욕감을 느끼며 분개한다. 더는 집단의 특질이 아니라 나 개인의 특질로 모욕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개개인을 존중하는 개인주의 문화가 약하고,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사회기 때문에 개인에게 쉽게 모욕을 주는 사회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작은 일에 분개하는' 사람이 많다. 모욕감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상 모욕감은 사람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준다. 사람을 해하는 살인, 폭행 등 범죄의 경우 모욕감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많지만, 이런 연구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겪는 모욕감 때문에 속으로 크게 분노하는 경험을 많이 한다. 그만큼 자주 겪는다는 것이다.

모욕감을 잘 다루지 못하면 심성을 왜곡시켜

모욕은 사람의 분노를 유발하는 가장 흔하고 치명적인 공격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모욕을 어떻게 다룰지, 모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가 삶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 과제를 잘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게 된다. 정신분석학에서 설명하듯이 상처는 무의식에 박혀 평생 우리의 심성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모욕감을 느낄 때 친구와 수다를 떤다거나, 그냥 생각하지 않고 잊어버리려 노력하는 방식으로 회피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대처는 피상적이고 사실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모욕으로 상처받은 트라우마는 내 속에 잠재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남에게 공격적인 성향으로 나타나고, 나의 성품을 왜곡시키는 피해의식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멘탈이 나갔다'는 표현을 잘 쓴다. 그만큼 건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사는 데 중요한 문제인 거다.

무대응을 주창한 스토아철학의 모욕평화주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래서 수양론이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딱히 모욕감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침을 주는 철학은 거의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구체적인 지침을 주는 철학이 있는데 그게 스토아철학이다. 사실 모욕에 대처하는 최상의 방법은 동양의 도교 사상가들처럼 아예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인데. 하지만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 방법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스토아철학자였던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사악한 상대에게 보복을 가하는 최상의 방법은 그와 같은 부류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모욕을 주는 사람에게 등을 보이는 것으로 만족했다. 로마의 황제조차도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로 인해 고민했다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사악한 사람이 자신을 모욕했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심했다고 한다. 만약 사악한 사람이 자신을 칭찬했다면 자기도 사악한 부류라는 것이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욱 심란할 것이 아닌가.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스토아철학자였던 세네카는 "모욕을 받고 분노하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분노한다고 해서 상대방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괜히 나만 분노로 인해 고통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모욕평화주의를 제창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지혜로운 자는 모욕을 참는다고 전한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모든 모욕에 대해서 대응을 거부하라고 말했다. 모욕받고 바보처럼 당하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스토아철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모욕평화주의자는 모욕에 대응하거나 보복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은 모욕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비치는 것이다. 즉, 모욕이란 저급한 단계이고 난 그런 단계를 넘어섰으니 너보다 우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모욕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모욕을 가한 사람이 오히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격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그는 자기 행동을 되돌아보게 된다. 모욕평화주의자들은 이렇게 모욕을 가하는 사람들을 훈련하는 것이다.

모욕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스토아철학자들은 "누군가의 모욕으로 상처를 입었다면 그건 우리 탓이다. 우리가 모욕으로부터 해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만 모욕은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스토아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모욕적인 것은 우리를 욕하거나 때린 사람이 아니라, 모욕적이라고 판단한 우리의 생각임을 잊지말라"고 했다.

상대의 모욕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욕이 남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욕평화주의의 본 의도이다. 스토아철학은 지난 2000년간 서구 철학의 근간을 이룬 철학의 학파 중 하나이다. 지금도 서구에서는 스토아철학을 명상법에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코 쉽게 생각할 철학은 아니다. 저명한 스토아철학자인 미국 미시간대학교의 윌리엄 어빈 교수는 "긴가민가했는데 모욕평화주의를 실천해 본 결과 생각보다 효과적"이라고 했다. 모욕평화주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러운 사람이라면 한번 실천해 보자. 밑져야 본전 아닌가.

참고자료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박문재 (옮긴이), 현대지성(2018)

『세네카의 화 다스리기』,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정윤희 옮김, 소울메이트(2014)

『알게 모르게 모욕감』, 윌리엄 B. 어빈, 홍선영(옮긴이), 마디(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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