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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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뉴스=박윤미 기자)* [고민의 발견]에서는 살면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부분을 다룹니다. 때로는 핫이슈를, 때로는 평범한 일상에서 소재를 채택합니다. 마지막 단락에는 고민과 닮은 책의 한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무서움으로 느껴졌던 대표님의 정확함이 결국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구나 배웠죠. 전 참 운이 좋아요. 지금까지 흔들림 없는 대표님한테 여전히 흔들림 없이 배우고 싶거든요. 그런 사수를 만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잖아요." 2019년 방영된 드라마 '멜로가 체질' 8화에 나온 한주의 대사다.

한주는 극 중 드라마 제작사 팀장이다. 그의 회사 대표는 일에 대한 자신감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커리어 우먼이다. 일 처리는 매우 정확하고, 직원들을 대할 때 '라떼'는 없다. 비록 잠깐씩 얼굴을 비추고 마는 조연이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시원하고 담백한 대표 캐릭터는 강렬했고, 사랑스러웠다.

위 대사에 이어 한주는 "대표님처럼 강하고 정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한주 옆에 앉은 대표가 코까지 훌쩍이며 눈물을 흘린다. 캐릭터의 반전이다. 잔뜩 취한 대표 입에서 나온 말은 이렇다. "아니야 나 안 정확해, 나 안 강해."

기자 생활을 하며 가까이 지내는 여성 중에 깊이 존경하던 이가 있었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건 가만히 있어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사람이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사회 활동도 왕성한 데다 시간을 쪼개 책도 여러 권 썼을 만큼 자기 삶에 열정적이다. '멘토'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누군가 내게 '멘토가 누구냐' 물었을 때 그녀를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 것은 그녀의 학식이나 사회적 위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그가 보여준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라던가 어떤 일 앞에서 옳고 그름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성숙한 태도는 그에 대한 존경심까지 갖게 했다.

그와 두어 차례 차를 마시고 사담을 나누면서 그도 보통 사람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았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엄마로서의 죄책감을 이야기하다 느닷없이 남편에게 화살을 돌린다든지, 친정엄마와 다툰 지극히 사소한 일화들은 대단하게만 느껴졌던 그녀를 다시 보게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조금은 실망했다.

완벽한 인간은 책에나 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그날에서야 깨달았다.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글쓰기(기사)를 가르치던 때가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한 학생이 메일을 보내왔다.

편지는 우연히 다른 동네에 갔다가 학원 선생님을 봤는데 선생님이 남자친구로 보이는 남성과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며 어떻게 선생님이 담배를 피울 수 있는지 화가 나 원장 선생님에게 이르고 싶은데 그래도 되는지를 묻고 있었다. 이어진 글은 좋아하는 친구 한 명이 자신에게만 이야기한 줄 알았던 비밀을 다른 친구들도 알고 있는 게 속이 상하고 배신감이 느껴져 절교하고 싶다는 고백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학생이 느낀 실망감을 충분히 이해할 것도 같았다.

"사람 누구나 다 그렇다"는 말을 썼다가 얼른 지웠다. 수신인은 이 말을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기도 했지만 '누구나'라고 단정 짓는 일도 어른으로서 삼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글과 함께 '장님과 코끼리' 우화를 덧붙여 보냈다. 학생은 수업에서 기자로서의 사명감이라던가 고발정신을 강조하던 내게 실망했을 것이다.

기대 뒤에는 바라던 것이 아닌 실망이 있을 때가 있다.

학생(A)은 학원 선생님을 '교육자'로만 봤다. 그 선생은 젊은 여성이었다고 했다. 청춘 남녀가 열애를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 담배는 나름 학원가가 아닌 다른 동네라 안심하고 피웠던 것 같은데, 하필이면 가르치는 제자에게 그 장면을 들켰으니 이건 대신 변명해 줄 수가 없다. 그 선생, 조심성이 없었다.

이번에는 '나에게만 비밀을 말했다는 친구(B)'의 입장에 서 본다. B는 A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만 해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다른 친구에게도 똑같은 비밀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수 있다. 비밀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다만 B로부터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A의 마음에 금이 간 것은 유감이다.

나이 들면서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누구나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다.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육아와 집안일, 학교 공부와 일을 동시에 하는 소위 '워킹 맘'이다. 아기 키우는 엄마들은 그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몇은 내게 "대단하다"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는 게 있다. 내가 게으를 땐 얼마나 늘어지는지, 허투루 보내는 시간은 또 얼마나 많은지를. 이런 모습까지 보고도 나를 "대단하다"라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실망할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실망하는 것은 결국 보이는 모습만을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본인의 문제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나 안 정확해, 나 안 강해"라며 울던 대표의 이면을 시청자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이를 혼자 낳아 기르면서도 열심히 사는 한주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봐 주는 대표의 눈을 통해 우리는 그에게 따뜻함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그는 한주의 처지를 동정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직원들의 사생활이 아닌 능력을 볼 줄 아는, 동시에 사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한주는 늘 강한 모습만 보여주던 대표가 술에 취해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강한 줄로만 알았던 대표의 눈물이 당황스러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극 중 한주 역시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주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정확하고 강한 모습으로 회사를 지켜나가는 자신의 오너에게 더 반했을 것이다.

사람, 대게 거기서 거기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일 수 있다. TV 드라마처럼 캐릭터의 이면까지 볼 수 있다면 고민하지 않을 일이지만, 삶은 드라마가 아니다.

혹, 특별한 줄 알았던 이에게 실망했다면 그를 좋아하는 내 마음 때문은 아닌지, 그것을 먼저 들여다보자.

늘 태평해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보면 어디선가 슬픈 소리가 난다.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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