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의 수고 덕에 편리하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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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뉴스=박윤미 기자)* [고민의 발견]에서는 살면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부분을 다룹니다. 때로는 핫이슈를, 때로는 평범한 일상에서 소재를 채택합니다. 마지막 단락에는 고민과 닮은 책의 한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최근 필자가 이사한 아파트에서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내용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분리수거 좀 잘해 달라는 지나치게 공손한 부탁.

입주민이 모인 채팅방은 방송 직후 급격히 활성화된다. 이때 쏟아지는 텍스트는 주로 "누가 큰 곰 인형을 의류 재활용 수거함 앞에 떡하니 버려뒀다"라거나 "떡볶이가 담긴 종이 그릇을 통째로 일반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린 사람이 있다"라는 것들이다.

분리수거는 그나마 양반이다. 흡연이 화두가 될 때는 '증언'과 '비난'이 동시에 터진다. 누가 어디 자리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 짜증이 났다거나, 침 뱉은 자리를 밟아 온종일 기분이 나쁘다는 멈출 줄 모르는 대화를 쫓다 보면 담배 연기를 맡았을 때보다 더 답답하다.

이 아파트 경비원들은 주민들이 배설(?)해 낸 쓰레기들을 정리하느라 온종일 구부정한 자세다. 눈을 마주친 날에는 내 쪽에서 건넨 인사가 상대에게 채 도달하기도 전에 "(박스 펴고 테이프 떼는) 이 일만 온종일 한다"거나 "해도 끝이 없다"는 푸념을 답인사 대신 받게 된다.

다세대 주택에 살 땐 테이프를 제거하고 박스를 펴서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 정보가 노출되는 것이 싫어 송장을 뜯어내는 정도가 다였을 뿐. 내다 버리기 무섭게 사라지는 박스들의 행방(?)을 알고부터는 박스 버리는 방법 따위는 관심 없이, 그저 '자주', '많이' 버리면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되는 것으로 착각했다.

박스를 마음껏 내다 버려도 비난이나 야단을 듣지 않던 다세대 주택의 동네에서는 음식물 쓰레기도 언제든 버릴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분명 어제오늘 내가 먹은 음식물의 쓰레기건만, 풍기는 냄새 탓인지 일반 쓰레기 버리는 일보다 훨씬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 때 손이 아닌 발을 사용한 적도 있다(통 주변에 붙은 음식물 찌꺼기와 냄새 때문에 도저히 맨손으로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궁색한 변명을 덧붙인다).

어느 날부턴가 음식물 쓰레기통이 깨끗했다. 누가 봐도 물 세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반짝반짝한 상태였다.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 청결함은 계속 유지됐다. 쓰레기를 버리다 알게 됐다. 옆집 아주머니께서 정해진 요일에 음식물 쓰레기가 수거되고 나면 통을 집에 가져가 깨끗하게 씻어다 두신다는 것을.

음식물 쓰레기통이 깨끗해진 뒤로는 뚜껑 여는 일에 유난 떨지 않을 수 있게 됐다. 한 건물 사람들도 툭 하고 던져 버리던 쓰레기를 얌전하게 내려놓는 것 같았다. 통 안에 흥건하던 국물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중국 음식을 시켜 먹은 날엔 그릇 내놓기 전에 반드시 음식물을 비우고 그릇을 대충이라도 씻어 봉지에 넣어 밖에 내놨다. 굳이 그런 수고를 자처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필자는 어머니를 나무란 적도 있다. 당당하게 "그들의 일"이라며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엄마가 이런 일 하면 설거지하는 사람 잘린다"라는 헛소리로 엄마를 제지하기도 했다. 그래도 필자의 어머니는 "쏟아지면 (그릇 수거하시는 분) 옷에 묻잖아…"라는 말과 함께하던 일을 이어가셨다.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의 수고 덕에 편리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편리함을 '특권' 혹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상대의 수고는 자신이 낸 대가에서 비롯된 것이라 당당히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누군가 당신에게 돈을 준다면 당신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이러한 일들을 군소리 없이 할 수 있는지. 남들이 어긴 원칙들을 혼자 다시 세울 수 있는지를.

다행히 입주민 모임 채팅방에서는 "입주민들이 돌아가며 분리수거장에서 잘못된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고, 담배꽁초 같은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있었다. 그리고 "'경비가 하는 일'이라거나 '돈 받고 하는데 당연하지' 따위의 말은 하지 말자"는 용감한 이의 발언도 있었다. 순식간에 채팅방은 정화됐다. 너도나도 쓰레기 줍는 일을 같이하겠노라 손을 들었다. 누군가는 "쓰레기봉투를 쏘겠다"고 해 경직돼 있던 채팅방 분위기를 이완시켰다.

어른은 '어떠한 행동의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다 큰 인간이 가져야 할 당연한 도덕이고 윤리이며 의무다.

내가 무심코 내던진 박스를 다른 사람이 펼치는 수고 그리고 귀찮다고 대충 담아 버린 쓰레기를 누군가 일일이 열어 손에 음식물을 묻혀가며 분류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다.

빨아 쓰는 일회용 행주를 쓰면서 아무 생각 없던 필자는 최근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이거 썩는 데 한오백년 걸리는 건 아닌가.", "편하기는 한데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러한 우문에 이슬아 작가는 다음과 같은 현답을 들려줬다.

'유리가 들어 있으니 조심하세요.'

아래엔 깨진 컵의 모양이 간단히 그려져 있었지.

우리는 같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그 봉투를 두고 왔어. 네가 붙인 경고문이 잘 보이도록 놓았어. 나도 너처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지만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었어.

너를 보며 생각했어. 윤리란 나의 다음을 상상하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버린 봉투를 야간 청소 노동자분이 무심코 집어 들다가 조금이라도 다칠 가능성. 깨진 유리 조각이 내 손을 떠난 뒤에 벌어질 미래. (중략)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남에게도 고통스러울 확률이 크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자신을 스친 위험 요소가 다른 이에게 옮겨가지 않도록 움직이는 거겠지.

-이슬아 작가,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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