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의 발견] "노키즈존은 왜 노키즈존인가요?"

우리는 누군가의 시공간을 침해하면서 어른이 됐다

박윤미 기자 | 기사입력 2021/05/15 [10:05]

[고민의 발견] "노키즈존은 왜 노키즈존인가요?"

우리는 누군가의 시공간을 침해하면서 어른이 됐다

박윤미 기자 | 입력 : 2021/05/15 [10:05]

▲ (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팝콘뉴스=박윤미 기자) * [고민의 발견]에서는 살면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부분을 다룹니다. 때로는 핫이슈를, 때로는 평범한 일상에서 소재를 채택합니다. 마지막 단락에는 고민과 닮은 책의 한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유독 아이들의 '소란'을 견디지 못하는 어른들이 있다.     

 

아이들은 시끄럽다. 

 

흥이 잔뜩 오른 어린아이들은 온몸으로 떠든다. 소리 지르거나 뛰는 행위는 태어나면서 장착한 옵션으로, 말귀 알아듣는 나이가 되기까지 웬만해서는 고장 나지 않는다. 이 기능은 사용자만을 위해 고안된 것이며, 추가금을 낸다고 한들 '타인에 대한 배려' 따위의 옵션은 추가할 수 없다. 그래도 영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참고 기다리기. 결국 시간이 해결하는 것 중 하나다.       

 

연령을 조금 더 낮춰 아기의 경우를 보자. 

 

아기는 어린이들처럼 뛰거나 소리 지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적할 만한 나름의 무기를 지니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울음'이다. 아기 우는 소리를 '응애응애' 정도로 표현한 문학가는 짐작건대 신생아를 가까이서 보지 못했거나, 어디서 대충 들은 타인의 경험을 자기 것인 양 차용한 것일지 모른다. 대부분 아기는 열에 여덟 "으아아아악" 하고 운다. 나머지 두 번은 "으악 으악 으악"이다. 급성장 시기(원더윅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때는 평소 잘 안 울던 애들도 악을 쓰고 운다. 그 시기, 부모들의 얼굴은 잿빛이다.     

 

때문에 아이들이 집이나 놀이터가 아닌 공공의 장소에서 익룡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는 일을 겪어본 사람들은 '노키즈존(no-kids zone)'을 선호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성향이나 취향이 나와 다르다고 손가락질할 이유는 없다. 누가 옳다는 답은 아무도 내릴 수 없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돈을 내는 사람은 갑(甲)의 위치에 있다. 갑의 페이에 따라 먹고사는 처지라면 을(乙)은 갑의 기분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노키즈존'은 이러한 복합적인 계산들로 인해 등장한 신(新)문화다. 

 

문화라는 것은 그 시대의 상을 반영한다. 수요 없는 공급이란 없다.     

 

시대의 흐름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노키즈존이라는 것이 과연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아이 시절을 건너뛴 어른은 없다. 이것이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라면 이것은 어떤가. 이쪽에서는 '갑'이지만 돌아서면 '을'인 포지션. '나는 어디에서나 갑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갑과 을이 아닌 '병'과 '정' 정도 즈음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걸쳐있는 삶도 나쁘다고 짐작할 수 없다.       

 

아이들은 원래가 소란스럽다. 아이에게서 점잖음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욕심이고 이기심이며 무지이다. 교회나 절이 아닌 이상 공공의 영역에서는 소음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노키즈존을 활성화하기 이전에 어린아이 일지라도 사람 많은 곳에서 뛰지 않고 소리 지르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을 당연시 해야 한다. 처음 보는 아이 때문에 방해받는다고 느껴진다면 매일 그렇지 않기에 '어쩌다 그런 날' 정도로 받아들이는 포용력도 길러야 한다. 

 

필자 역시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1년 반여 간 노키즈존을 고집한 경험이 있다. 고백하건대, '키즈들'보다 '갑'들의 마음을 우선 헤아렸다. 어떤 깨달음은 뜻하지 않게 얻는다고 했던가. 노키즈존임을 알면서도 어린 자녀와 함께 방문했던 손님에게서 "노키즈존을 운영하는 이유에 관해 설명해 보라"는 말과 욕을 들었던 날 노키즈존을 고집하는 것이 개인의 철학이나 신념 같은 것이 아닌 '갑의  눈치보기' 혹은 '매상 감소를 우려한' 것이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한 책을 만난 후 바로 출입문에 붙은 노키즈존 팻말을 떼 버렸다.      

 

"'노키즈존'이라는 말을 보고 철렁했다.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며 식당이나 카페에서 아이들 출입을 금한다는데 그 논리가 옹색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공간을 침해하면서 어른이 됐다. 여전히 힘 있는 어른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의 시공간을 임의로 강탈하면서 자기를 유지한다. 왜 아이들을 대상으로만 권리를 주장하는 걸까? 그래도 되니까 그럴 것이다.(...) 배제를 당하면서 자란 '키즈'들이 타자를 배제하는 어른이 되리란 건 자명하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대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은유, '다가오는 말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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