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자살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는 부조리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사진=픽사베이)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전남 완도에 체험 활동을 갔던 일가족의 차량이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 15일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2022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첫해인 2020년 자살자 수는 1만 3195명으로 전년보다 604명(4.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자 수를 의미하는 자살률은 25.7명으로 전년 대비 1.2명 줄었다. 자살률이 가장 높았던 2011년 31.7명과 비교하면 19.0% 줄었지만 OECD 회원국 중에서는 여전히 최고 수준이다.

한국 자살률, 여전히 OECD 1위

2019년 통계로 보면 우리나라 자살률은 24.6명으로 OECD 평균인 11.0명의 2.2배에 달한다.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로 OECD 1위다. 한국 사회의 과도한 경쟁 풍토와 불평등 사회, 왜곡된 물질적 욕망이 한국 사회의 자살률을 높이는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이런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는 '내가 무엇 때문에 살지?', '이렇게 꼭 살아야 하나?'라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허무주의와 죽음으로서의 도피 의식인 타나토스가 가장 많이 도사리고 있다. 즉 한국인은 항상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다.

'부조리'는 다소 낯선 단어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부조리한 상황을 겪으면서 산다.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제도나 관행을 부조리하다고 한다. 일상에서 논리적으로 모순되거나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나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접할 때도 부조리하다고 규정한다. 또한 일상에서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극도의 고통과 괴로운 상황에 닥칠 때도 부조리하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시대에서 부조리의 시대로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나 알베르 카뮈 등이 말하는 부조리는 우주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를 사유하는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적 인간론이 와해하면서 발생한 혼란 속에서 부각된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부조리에 대한 통찰은 인간 존재에 대한 비극적 관점에 근거를 둔다. 염세주의는 그런 비극적 관점 중 하나다. '염세주의(pessimism)'라는 말은 가장 안 좋은 상태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최상급에서 유래한 것이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현명하게 살려면 긍정적인 것만 봐서는 안 되고 가장 부정적인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쇼펜하우어가 설명하는 자살에 대한 예방책은 '이 세상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애초에 이 세상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 닥쳐도 충격받을 일이 없으니 자살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즉 가장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세상을 살면 작은 일에도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긴다. 철저한 염세주의 관점에 기초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굳이 그의 염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제공해 주는 면이 있다.

쇼펜하우어의 뒤를 이어 실존주의 창시자로 불리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를 최초로 철학적인 주제로 조명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죽음으로 끝나는 삶의 무의미성과 부조리성에 직면한 인간은 원래 불안과 절망에 휩싸이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원래부터 삶의 무의미성과 불안 속에서 살았나? 그렇지는 않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과거 유럽 사회는 죽음이 야기하는 삶의 무의미성과 부조리성에서 비롯되는 부정적인 세계관과 불안과 절망 등 부정적 감정을 기독교적인 내세 신앙으로 억제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계몽주의 운동 등으로 기독교의 종교적 권위가 상실되면서 인간은 허무의 바다에 던져지고 끝내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절감하게 된다.

불안이 지배하는 시대를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불안과 절망감이 어느 시대보다도 인간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은 불안과 절망을 피하려고 군중 속에서 함몰되어 자신을 망각하며 살게 된다. 내 삶의 기준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게 된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군중이 원하는 타자의 삶을 사는 괴상한 일이 일상이 된다. 피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 운명적으로 던져진 인간은 자신마저 기만하는 가면으로 그 부조리한 상황을 덮으면서 또 다른 부조리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일상성의 부조리성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독일 철학자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운명을 사랑함으로써 인간 삶의 부조리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극복하는 부조리성이란 주어진 부조리성을 의지적으로 헤쳐 나가려는 인간의 적극적인 대응을 의미한다. 이런 대응을 통해 인간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기 자신을 초월한 자가 된다.

사르트르는 오히려 세계의 부조리성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에게 희망은 존재의 무상함을 똑바로 보고 그것을 끌어안는 데서 시작된다.

알베르 카뮈는 자살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는 사막에 던져진 부조리한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생이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이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하기에 아무 데도 쓸모없는 진리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中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이란 '삶의 부조리성과 내 지식의 한계를 벗어나 존재하는 자연의 낯섦과 혼란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견디는 자'라고 말한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인간이란 '부조리를 의식하며 거기에 맞서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시지프는 떨어질 줄 알면서도 거대한 바위를 반복해서 산꼭대기로 올리는 것이다. 이 세계에 내던져진 우리를 모두 '부조리한 인간'이 아닐까? [팝콘뉴스]

참고자료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지은이),김화영 (옮긴이) 민음사 2016

'실존주의 심리치료' 어빈 D. 얄롬 (지은이),임경수 (옮긴이), 학지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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