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들어주고 가끔 고개를 끄덕여주며 등을 쓸어주는 것으로도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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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뉴스=박윤미 기자)* [고민의 발견]에서는 살면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부분을 다룹니다. 때로는 핫이슈를, 때로는 평범한 일상에서 소재를 채택합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 "힘든 사람하고는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 대개 이어지는 말은 이런 것이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앓는 소리 계속 들어주는 것도 고역이다."

누구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의 충고를 한마디로 정리한 말이 있다.

"상대가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게 하지 말라." 스트레스를 지속해서 호소하는 상대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망가지는 상황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중고 물품 거래로 인연이 된 동생이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는 기저귀가 맺어준 인연'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당시 나는 협착증 수술을 하신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필요한 기저귀를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생각보다 빨리 회복하시면서 걸을 수 있게 돼 기저귀는 단 두 장만을 쓴 채 그대로 남았다.

중고 앱을 통한 거래는 빠르고 순조롭게 이뤄졌다. 주소를 받고 보니 내게서 기저귀를 구매한 상대는 대구 사람이었다.

택배 보낼 박스에 기저귀를 담으면서, 나는 간단히 메모 몇 줄 적은 종이도 넣었다. 웬 오지랖이었는지 그때는 상대가 내 처지와 같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다. "간병하느라 힘드실 줄로 압니다. 병간호하시는 분이 식사를 잘하셔야 합니다."

며칠 뒤 대구에서는 택배 잘 받았다는 문자가 왔다. 거기에는 메모를 읽고 병원 화장실에서 한참 울었다는 내용이 함께 담겨 있었다.

'선아(가명)'라는 이름을 가진 홍 씨 성의 그녀는 나와는 한 살 차이였다. 비슷한 나이 덕에 우리는 5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녀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었지만, 아버지를 돌보는 것은 오롯이 그녀 몫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의 어머니는 지방의 한 요양병원에 장기 입원 중이었고, 남동생은 어떠한 사건에 휩쓸려 복역 중이었다.

그녀의 가정사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이후로, 필자인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한동안 힘들었다.

가족 중 한 사람에게만 힘든 일이 있어도 삶이 팍팍해지는데, 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식구를 돌봐야 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아는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다달이 돈을 보내야 했고, 남동생에게도 얼마씩의 영치금을 꼬박꼬박 보냈다.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다음은 내게 전화를 걸어 전에 없던 신세 한탄을 하기 일쑤였다.

얼마 지나 선아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다. 소식을 접하고 마치 내 일 같아 속상한 감정을 끌어안고 잠든 기억이 있다.

아버지를 잃은 선아는 나를 '감정의 쓰레기통' 삼는 것 같았다. 장례 기간 중 일어난 별것 아닌 일을 내게 전하며 화를 버럭 냈다. 기도해주고 가셨다는 교회 목사와 신도들을 비하하는 발언은 서슴지 않았다. 역할이 미비한 친구는 친구도 아니라며 욕을 했다. 그때 나는 조금 지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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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선아는 모처럼 만에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남동생이 출소했고, "앞으로 정신 차리고 살겠다"는 약속을 했다며 긴 시간 자랑했다. 그날 선아가 전해 준 그 소식은 내 안에 가라앉아 있던 짐바윗덩어리들까지도 가볍게 만드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고, 기대는 허망하리만치 쉽게 물거품이 됐다.

남동생은 각오를 다진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누나에게 대형 세단과 정장을 요구했다. 병원에 계신 선아 어머니는 선아에게 느닷없이 목걸이와 반지 같은 금붙이 하나 없는 신세를 한탄한다고 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선아는 얼마 못 가 자궁경부암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그때 선아가 받은 암 보험금은 동생의 중고차가 됐고, 어머니의 목걸이와 팔찌가 됐다.

이후 들려온 소식은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철부지 남동생은 기어코 사고를 쳐 다시 철창신세를 지게 됐고, 선아의 어머니는 병원에서 나와 딸에게서 돈을 받아 친구 많은 동네에 집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다달이 딸이 부쳐주는 돈으로 빈곤하지 않은 삶을 살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몇 번이나 선아의 말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어떻게 가족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이럴 수 있을까.

이어 고백하자면, 나는 선아의 전화를 몇 번 피하기도 했다. 뻔했다. 선아는 매번 그랬듯 가족 욕을 할 것이다. 내 쪽에서는 맞장구칠 수 없는 소재다. 그러면서도 선아는 '가족에게서 거리를 좀 두면 어떻겠냐'는 내 조언은 듣지 않는다.

그때 "너무 힘든 사람은 가까이 두지 말라"는 어떤 이의 충고가 떠올랐다. 선아와 연락을 서서히 끊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당시에는 나도 폐암 투병 중이시던 아버지를 여의었다. 잘 해냈던 일들도 갑자기 무너지던 시기였다. 충격과 우울감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말이라도 하면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는 다행히도 내 이야기를 침착하게 끝까지 들어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날도 보통의 날과 다름없이 퇴근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한바탕 하소연했다. 한참 울다 문득 거울을 마주하게 됐는데, 그 안에는 내가 아닌 선아가 있었다.

놀라 전화를 끊고, 잠시 뒤 다시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그러나 친구는 뜻밖의 말로 나를 위로했다. “나는 지금 네 이야기를 들을 뿐이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네 마음이 위로된다면 나는 얼마든지 너의 전화를 받을 수 있어.", "너를 위로할 만큼의 에너지는 내게 충분히 있으니까 더 해도 (나는) 괜찮아."

앞에 있는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은 능력이지만, 우울하거나 불운한 일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의 감정에 휩쓸린다면 그것은 무능력이다. 자신을 컨트롤할 힘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조금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상대가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고민이 듣기 싫은 내 쪽에서 만든 과대망상이다. 감정과 상황은 상대의 것, 듣는 쪽에서는 '잘 듣기만' 하면 된다.

감정이 내게로 건너오려 할 때는 이런 생각으로 마인드 컨트롤하면 된다.

내 안에 있는 그릇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릇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그릇을 깊고 넓게 만드는 돌 같은 것이라고.

상대가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면, 조금 움직이면 된다. 상대가 던지는 쓰레기를 가만히 앉아 받을 필요는 없다. 만나서 차를 마시던, 맛있는 음식을 먹던 경치 좋은 곳을 향해 드라이브하던 그렇게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감정의 쓰레기통은 상대가 아닌 내가 만드는 것임을 잊지 않고 살면 좋겠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인데, 힘든 일은 전염되지 않는다. 옮거나 번지는 것은 기쁨과 행복뿐이다. "행복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줄어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2022년 설 연휴가 끝이 났다. 우리 모두 연휴 동안 소중한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했던 '그 복'을 잊지 않고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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