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 일의 대명사…99% 욕보이는 1%가 돼서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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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뉴스=박윤미 기자)*[고민의 발견]에서는 살면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부분을 다룹니다. 때로는 핫이슈를, 때로는 평범한 일상에서 소재를 채택합니다. 마지막 단락에는 고민과 닮은 책의 한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비 오는 날 음식을 시켰다며 콜라를 세게 흔들어대는 한 배달원의 동영상이 얼마 전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이 일은 급기야 기사화까지 됐다.

콜라를 흔든 배달원은 영상 속에서 "비 오는 날 시켜 먹는다"는 불만과 함께 심한 욕설까지 쏟아내고 있었다.

네티즌은 영상 속 배달 기사를 손가락질했다. "비 오는 날 일하기 싫으면 나오지를 말지 수수료(배달비)는 벌고 싶고, 일은 하기 싫다는 건가?", "인성이 저러니까 배달 일하지"라며 혀를 찼다.

이 일과 별개로 한 때 음식 배달 기사들이 배달 중 음식을 몰래 빼 먹는 일이 논란이었던 적이 있었다. 한 배달 기사는 자랑이랍시고 온라인에 치킨 몰래 빼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공유했다. 또 다른 배달 기사는 "배달 네 번으로 오늘 밤 먹을 치킨 한 마리 완성"이라며 들고 다니는 통에 담긴 치킨을 사진으로 찍어 자랑하기도 했다. 이후 치킨 박스에는 '치킨 도난 방지(?)'를 위한 스티커 자물쇠가 채워졌다.

요즘 음식 배달 서비스는 예전과 다르다. 직원을 고용해 배달만을 전담케 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몇몇 중국집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요새는 음식을 주문하는 배달 전문 애플리케이션이 알아서 음식점 근거리에 있는 배달기사들에게 콜을 띄운다. 배달비 또한 소비자가 음식값과 함께 결제하거나 별도 지불한다.

방식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를 가져왔다. 음식점에서 배달 기사를 고용했을 시대에는 '음식점의 서비스'였던 것이, 지금은 일종의 '심부름', '부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연히 부탁하는 쪽에서는 나를 대신해 시간과 체력을 쓴 쪽에 적절한 대가를 지불한다. 그런데도 대가를 받은 이가 콜라를 흔든다거나, 씻지 않은 손으로 치킨을 몰래 빼먹는 등 반칙을 저지르면 가볍게 웃고 넘기기란 쉽지 않다. 직접 겪지 않은 일 일지라도, 언제든 내가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내 일이 되기도 한다.

결국 몇 명의 배달 기사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대부분의 배달 기사들까지 욕먹었다.

육체를 사용하는 노동은 대부분 정직하다. 음식 배달도 육체를 사용하는 노동이다.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얻는 신성한 직업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일의 가치를 보기보다는 사건 당사자와 일을 먼저 연결한다. 그래서 "못 배운 것들이 음식 배달한다"느니 "평생 치킨 도둑질이나 해서 먹고살라느니" 하는 악플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 단 1~2% 때문에 98~99%가 욕먹는 것이다.

사실 악플을 쓰는 사람들도 배달 기사 전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사건 당사자와 그가 가진 직업만을 놓고 볼 뿐이다. 물의를 일으킨 사람은 그렇게, 자신이 하는 일의 대명사가 된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블랙박스가 개발되기 전에는 '교통사고를 내더라도 택시는 피하라'는 말이 있었다. 이런 조언을 하는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택시 기사들은 사고의 크기와 상관없이 무조건 병원에 입원하고,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한다'는 건너 들었다는 이야기로 택시 기사 보기를 돌보듯 하게 했다. 짐작건대 이 또한 몇몇 택시 기사들이 전체 택시 기사를 사기꾼 취급당하게 한 일일 것이다. 선량한 택시 기사들이 들으면 참 억울하고 속상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일은 배달 기사, 택시 기사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의 피의자는 계모의 대명사가 됐고, 어린이집에서 원생들을 폭행한 선생은 보육교사의 대명사가 됐다. 코로나19 중에 대면 예배하지 말라는 나라의 방침을 어긴 교회들은 대한민국 모든 교회를 헌금에 미친 사이비로 만들었다.

필자가 아는 한 택시 기사는 한 달에 몇 번 안 되는 휴무일에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 다닌다. 그는 자신의 택시 안에 어렸을 적 부모를 잃은 미아 사진들을 걸어놓기도 했다.

화곡동의 한 교회는 목사와 교인은 있으나 교회 자체는 없다. 코로나19 전에는 가까운 학교 운동장을 빌려 예배를 진행한다. 예배 중 거둔 헌금이나 십일조 등은 삶이 힘든 이웃들에게 나눠준다.

얼마 전 가수이자 탤런트인 한 여성이 오랜만에 TV에 나와 재혼한 남편과 남편의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딸과의 지난 시간을 이야기했다. 성인이 된 딸과 친구처럼 지낸다는 그는 "다른 사람 자식, 길러볼 만 한 일이다"는 말을 했다. 그동안 우리가 사건·사고를 통해 숱하게 접했던 '계모'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감동은 한 시절을 지나면 잊힌다. 좋은 사람들이 가진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습성 탓인지 미담이나 선행은 나쁜 일보다 세상에 덜 알려지는 까닭이다. 반면 나쁜 것들은 신기할 만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에는 '나쁜 일'이 더 진하게 남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철저한 개인이지만, 단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 단체라는 것은 여러 형태다. 가족이 될 수도, 학교일 수도 있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나 한 사람쯤이야' 하다가는 자신이 소속된 단체를 단박에 욕 먹일 수 있다. 대개 자식이 비뚤어지면 사람들은 부모를 욕한다. 학생이 공부 안 하고 불량하게 행동하면 '학교'부터 궁금해한다.

일도 마찬가지다. 혹 적성에 맞지 않거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고 해도, 그 일을 사랑하고 열정을 쏟는 다수를 위해 자기 얼굴에도 침은 뱉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그 일의 대명사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일어난 일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행복은 일어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인식하고, 그 전체를 어떤 마음 상태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리고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어느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최악만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최선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까? 어떤 것에 관심을 돌리고 마음을 쏟으면 그것은 점점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최선이나 최악이 우리의 해석 안에서, 그리고 자신 안에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 수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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