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마비 몸으로 대학 편입에 대학원 졸업까지...지독한 노력으로 꿈 이룬 김기택 씨

(팝콘뉴스=박윤미 기자)* 울타리[fence]: 모든 사람이 가족과 이웃이 되는 이야기들.

대부분의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와 가정, 학교 같은 ‘사회적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간혹 울타리 없는, 누구보다 울타리가 필요한,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울타리를 걷어찬 이들도 있습니다. 코너 [울타리]는 그런 이웃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독자들의 관심이 그들에게 필요한 울타리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설한 코너입니다. 기사를 읽는 동안만큼은 마음의 울타리를 활짝 열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양재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김기택 씨.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마스크를 내렸다.(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장애인이라고 하면 무턱대고 '불쌍하다', '가엾다', '무능력하다'는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분들이 계시는데, 장애인이라고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같은 사람이고, 옆집에 사는 평범한 이웃이다."

전신마비 장애인 김기택(44) 씨는 장애인식개선 및 장애 예방을 위한 안전교육은 물론 장애인차별금지법 같은 장애 관련법을 교육하는 '전문강사'다.

그는 1997년 대학교 2학년 때 실내 수영장에서 다이빙 사고로 목을 다쳤다. 자유형 입수 다이빙을 하다 수영장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나중에 알게 됐다. 수심이 낮아도 너무 낮았다. 그날 스물한 살의 꿈 많고 건장했던 청년은 그렇게 척수 장애인이 됐다.

김기택 씨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과 국립재활원에서 1년 가까이 재활에 매달렸다. 그러나 몸 상태는 기택 씨의 정신력과 의지를 따라오지 못했다. 장애를 없던 일처럼 낫게 할 방법 또한 찾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뭉친 근육을 푸는 물리치료와 글씨쓰기, 타이핑하기 같은 일상을 위한 작업 재활 훈련뿐.

사고 당일까지 김기택 씨는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동기들과 다른 게 있다면, 교사이신 큰아버지와 외삼촌을 보고 자란 덕에 오래전부터 '교사'의 꿈을 갖고 있었다는 것.

기택 씨는 공부도 웬만큼 하는 학생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농구, 축구 같은 운동에도 관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되면 교실에서는 영어를 가르치고, 운동장에선 같이 뛰어노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는 상상을 자주 했다. 고민하지 않고 교직과목을 이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다이빙 사고는 총천연색이던 기택 씨의 꿈을 전부 까만색으로 덮어 버렸다.

그때를 떠올리며 기택 씨는 말했다. "누구를 가르치는 건 고사하고, 퇴원하고 집에 와서 혼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정말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다 큰 아들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도 있었고, 나 혼자 이렇게 누워 뒤처져 사는구나 싶은 생각에 심각하게 좌절도 했다."

김기택 씨는 여전히 불편한 몸으로 살고 있다.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오랜 꿈,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이뤄냈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도전과 노력이 '기적'이라고 한다.

김 씨는 유한대학교 지역직업교육거점센터 강사로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 양성과정' 수강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장애인에티켓'을 비롯해 '장애인법의 이해',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사례' 등의 과목을 담당한다.

그가 속한 (사)한국척수장애인협회에서는 '장애인식개선교육센터 장애인식개선 강사'로 활동 중이다. 장애인식개선 교육을 요청하는 학교나 단체 어디든 찾아가고 있다.

▲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후천적 장애발생 예방교육' 중인 김기택 씨.(사진=김기택 씨 제공) © 팝콘뉴스


국립재활병원 소속 강사이기도 한 김기택 씨는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후천적 장애발생 예방교육' 일도 맡고 있는데, 이 강의는 김기택 씨가 겪은 다이빙 사고를 비롯해 낙상사고, 일상에서의 장난으로 인한 사고 등을 예로 들어가며 진행돼 학생들의 반응이 매우 좋은 편이다.

김기택 씨가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도 자유롭게 이동하며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내린 용감한 다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씨는 퇴원 후 우울감을 앓다 문득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생각하며 법 공부를 다짐했다. 생각은 굼떴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김기택 씨는 연필 하나 혼자 쥘 수 없던 불편한 몸으로 대학 편입 시험을 치러 법학과 3학년 출석부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 2012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심화된 법 공부로 자신의 한계를 늘려 나갔다. 당시 쏟은 피, 땀, 눈물이 오늘날 김기택 씨에게 '교수', '강사'와 같은 타이틀로 돌아온 것이다.

김 교수는 "장애를 가지고 살다 보니, 너무나 답답하고 불합리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어느 것 하나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 같은 장애인들,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고민했고, 우선 법을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법학도가 되기를 결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손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어 손에 보조기 차고 연필을 끼워 큰 종이에서부터 시작해 작은 노트까지 종이 크기를 줄여가며 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버텼나 싶다"며 "대학원에 진학한 것 또한 매우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하신 교수님들과 동료들 덕에 대학원에서 많이 성장했다"고 회상했다.

김기택 교수는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 제도 덕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살고 있다.

그는 "요즘은 장애인 이동권이 많이 보장된 데다 활동지원사들의 장애인에 대한 이해 및 인식 수준 역시 많이 높아져 장애인의 사회 활동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개선돼야 할 일들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그간 팝콘뉴스가 만나온 중증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김기택 씨 또한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위해 중증장애인 담당 활동지원사들에 대한 급여 수가는 비중증장애인 담당 활동지원사들과 차등을 둬야 한다며, 이 문제의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건물 1층 음식점과 커피숍 등의 경사로 설치 같은 문제는 세련된 이 사회에 더는 어울리는 외침이 아니라고 했다. (이제는 알아서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중증장애인 돌봄이 힘들다고 전화로 '못 간다'며 통보하는 분을 겪은 적이 있다"며 "업무의 강도에 따라 활동지원사에 대한 예우도 달라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척수 장애인들이 이 문제를 공론화한 지가 꽤 됐다"고 밝혔다.

김기택 교수는 24년 전 사고를 두고 "이제는 겸허히 받아들인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다치지 않았다면, 몸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일들을 알게 됐다. 신앙의 힘이 컸다. 돈과 명예 또한 살아가는데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것 또한 사고를 통해 일찍 깨달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어렵게 법 공부를 마친 것도 어쩌면 우리나라의 수많은 장애인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사는데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라는 그분의 뜻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요즘 김기택 교수는 매주 토요일 우리동작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운영하는 번역 스터디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구성원 모두 장애인이다.

한때 영어 교사를 꿈꿨던 그는 "회원들과 함께 번역한 책이 올가을 즈음 출간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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