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전신마비 돼 무용수 꿈 접은 장애표현예술연대 김형희 대표

(팝콘뉴스=박윤미 기자)* 울타리[fence]: 모든 사람이 가족과 이웃이 되는 이야기들.

대부분의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와 가정, 학교 같은 ‘사회적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간혹 울타리 없는, 누구보다 울타리가 필요한,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울타리를 걷어찬 이들도 있습니다. 코너 [울타리]는 그런 이웃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독자들의 관심이 그들에게 필요한 울타리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설한 코너입니다. 기사를 읽는 동안만큼은 마음의 울타리를 활짝 열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장애인표현예술연대 김형희 대표. 화가이자 임상미술치료사다.(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길이 끝나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어지면

새봄이 자라난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시인 박노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중학교 3학년생 여자아이의 엄마이자, 한때 무용수를 꿈꿨던, 화가이면서 임상미술치료사인, 그리고 12년째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 대표를 맡은 김형희(52) 씨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적힌 박노해 시인의 '길이 끝나면'의 한 구절이다.

김형희 대표가 살아낸 기적 같은 시간을 아는 사람들은 이 글귀와 그녀의 삶이 닮았음을 모를 수 없다.

'그 길'에 발을 내디딘 것은 그녀가 소녀일 때의 선택이었다. 길은 아름다웠고, 그녀 곁엔 나비들이 따라다녔다. 외로울 새가 없었다. 길가에 줄지어 선 나무들은 때에 맞춰 그녀에게 그늘을 내어주었다. 꽃들도 잊지 않고 계절에 어울리는 향기를 선물했다. '이보다 아름다운 길은 없을 것'이라고, '열심히 걷다 보면 분명 비밀의 화원이 나타날 것이고, 그 안에 독무를 펼칠 수 있는 넓은 무대가 마련돼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상상했다. 그녀는 무대만을 생각하며 쉬지 않고 걸었다.

'그 길'에 낭떠러지가 있을 줄은, 그녀도 그녀를 따라다니던 나비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걸었다. 갑작스럽게 발아래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걸음을 멈출 새도 없이 그녀는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찰나였다.

그렇게 그녀의 온몸은 부서졌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됐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그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꺼풀을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뿐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꽃길 위에서 춤추던 그녀였다. 그래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시 꽃길 위에서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세뇌시키며 내내 잠만 잤다. 그렇지 않고서는 맨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갓 20대 초반, 대학교 4학년, 그것도 1학기가 막 시작될 무렵인 초봄의 3월, 무용수를 꿈꾸던 김형희 씨는 교통사고로 척수를 다치면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됐다. 어렸을 때부터 몸을 쓰며 살아온 준프로 무용수에게 "앞으로는 춤출 수 없다"는 일종의 사형선고가 떨어진 것이다.

시련은 생각보다 강했다. 사고 이후 그녀는 혼자 밥을 먹을 수도, 용변을 해결할 수도 없었다. 자식들이 원하는 것들을 묵묵히 밀어주던 부모는 딸 곁에서 수족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렇게 그녀는 3년이라는 긴 시간 부모와 붙어 지내며 치료를 받고 재활 운동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눈물겨운 노력과 정성에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매우 단단하고 강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전신마비 딸에게 대학 졸업장을 딸 것을 권유할 정도로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했다. 그녀 역시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더는 누워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장도 따고, 제2의 인생도 살겠다고 결정했다. 그날, 그녀 발아래 새로운 길이 생겼다.

▲ 작업 중인 김형희 화가(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재활에 목숨을 걸었다. 제일 처음 그녀는 손목에 붕대를 감고 손과 붕대 사이에 붓을 끼웠다. 배운 적도, 흥미도 없는 분야지만, 그림을 통해 팔에 힘을 기르고 손가락의 감각을 깨워보고 싶었다. '하면 된다'고 뇌를 속였다. 이젤 앞에서 10분, 20분 시간을 늘려 앉아있기를 매일 같이 했다.

긴 병원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방에 틀어박혀 무용수들이 나온 잡지 사진을 보며 온종일 그림을 그렸다. 그림 그릴 때만큼은 아무것도 못 하는 쓸모없는 인간이 아닌 기분이었다. 책을 사다 그림을 글로 배웠다. 재료의 성질이라던가 물감 개는 법 같은 기본들을 혼자 깨치면서 조금씩 그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몇 시간씩 이젤 앞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그녀의 손에서는 하나둘 작품이 탄생했다. 그녀는 그렇게 무대가 아닌 캔버스에서 춤을 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린 무용수들은 그녀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림을 그려서 화가가 되고 화백으로 불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그저 팔에 힘이나 기르자 하고 시작한 거였거든요. 물론 그림 그리는 동안 많은 것을 얻었어요. 마음에 위로도 되고 힐링도 되더라고요. 그런데 화가로까지 인정해 주는 분들이 생기면서 그림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된 건 사실이에요."

그녀의 겸손함과는 달리, 그녀의 그림들은 단독으로 혹은 여럿의 그림과 함께 많은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만났다. 그동안 그녀가 참가한 전시회는 어림잡아 300여 회나 된다.

그녀는 그림에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림은 본업이 아닌 취미라고 말한다. 김형희 씨는 어머니 덕에 성균관 대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고, 욕심을 내 대학원에 진학해 배움의 길을 이어갈 수 있었다.

김형희 씨는 2010년 CHA의과학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임상미술치료를 전공했다. 그렇게 석사학위와 함께 얻은 '임상미술치료사'는 김형희 씨의 직업, 본업이 됐다.

"임상미술치료 같은 경우는, 제가 제 마음을 살피고 다스리기 위해 시작한 거예요. 우연히 미술치료 자격증 팸플릿을 보게 됐고, 그 과정에서 1급 자격증을 취득한 뒤에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이 일을 통해 저처럼 사고로 중도 장애인이 된 분들을 만나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상담을 하는 일을 해요."

김형희 대표는 자신이 장애인인 까닭에 환자들과의 라포르 형성이 비교적 수월하다고 했다. 김 대표 자신 역시 환자들이 토로하는 정신적 우울감과 스트레스를 겪었던 터라 저절로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고. 김 대표에게 상담받은 환자 중에는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 시작해 화가가 된 사례도 있다.

▲ 김형희 대표의 작품. 2015년 Dancig10 (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김 대표의 본업은 임상미술치료사 외 하나 더 있다. 그녀가 지갑 안에 12년째 넣어 다니는 명함, 거기에는 '장애인표현예술연대 대표' 글자가 찍혀 있다. 그녀의 직업이다.

장애인표현예술연대에서는 무용과 음악, 그림, 글 등 예술이 되는 모든 분야의 장애인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각 분야의 예술을 접목한, 이를테면 뮤지컬 같은 종합 예술 활동을 만들고 있다. 장애인 예술가들의 연대의 장인 셈이다. 예술가 기질을 타고나 무용과 그림, 글까지 두루 섭력한 그녀에게 무엇보다 어울리는 일이다.

김형희 대표는 지금의 길을 걷게 된 것을 가리켜 "가족 덕"이라고 했다. 5년간 연애하고 결혼한 연하의 남편과 건강하고 예쁘게 자란 딸의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의 묵묵한 돌봄과 희생이 있었기에 욕심껏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었다고.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이 아니었다면 재활을 위해 그림을 시작할 수도, 나 자신의 우울을 돌본답시고 미술 치료하러 매주 아이를 떼어 놓고 공부하러 다닐 수도 없었을 거예요. 가족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아마 대학원에도 다니기 어렵지 않았을까. 결국은 가족 덕분에 제 우울감도 떨쳐낼 수 있었고, 또 저와 처지가 같은 이들의 마음도 위로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해요."

김형희 대표는 복지관이나 센터 같은 곳으로 출강을 나가는 일도 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로 사람 간 만남이 조심스러워진 탓에 강의가 줄긴 했으나 여전히 김형희 대표를 기다리는 곳들이 많다.

강의가 줄며 대신 예정에 없던 여유를 갖게 된 김 대표는 요즘 내년 전시회와 에세이집 출간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미술 작품과 장애인표현예술연대의 활동들을 소개하는 일도 한다.

김형희 대표는 자신을 "'해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이루고 마는 성격",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정의했다. 비장애인보다 쉽게 피곤해지는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지만, 정신력만큼은 약하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다.

김형희 대표는 가정 형편 탓에, 혹은 나이를 핑계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주위를 보면, 가령 무용을 하고 싶었는데 가정 형편이 안 돼 못 하다가 나중에 돈 벌어 무용 학원 다니면서 배우는 사람처럼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 돼 못 하다가 나중에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반면 멀쩡한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도 외부 핑계 대며 말로만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고 싶은 것은 시도해야 한다. 길은 그렇게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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