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함부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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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뉴스=박윤미 기자)* [고민의 발견]에서는 살면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부분을 다룹니다. 때로는 핫이슈를, 때로는 평범한 일상에서 소재를 채택합니다. 마지막 단락에는 고민과 닮은 책의 한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걔 지잡대 출신이더라?"

한 친구에게서 몰라도 좋을 다른 친구의 학력을 전해 들었다. (지잡대라는 말은 '지방에 있는 잡스러운 대학'의 줄임말로, 유명하지 않은 대학을 낮추어 비아냥거릴 때 사용되는 신조어다.)

흔하지는 않지만 여러 번 들었던 그 말은 웬일인지 그날따라 훅하고 나의 명치를 강타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방어할 새도 없었다.

친구는 앞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친구가 지잡대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것을 알면서 어떻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지잡대'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잠시 의아했고, 곧 불쾌한 감정에 휩쓸렸다.

"언니 X가슴!"

2020년생 아기를 둔 엄마 다섯이 모인 채팅방에 딸아이와 찍은 사진을 올렸다. 평소 같으면 아기가 귀엽다느니 그새 많이 컸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은 다른 날과 달랐다. 한 엄마가 아이가 아닌 나의 외모를 가리키며 놀린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ㅋㅋㅋ'이나 'ㅎㅎㅎ'이 붙어있지 않아 영혼의 가출은 막을 수 있었다.

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하고 내뱉은 아기 엄마는 내가 가진 콤플렉스를 잘 아는 사람이다. 특히 둘째, 셋째 고모들의 체형을 닮은 '그것' 때문에 내가 목 디스크와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다.

두 번까지는 참았는데, 세 번째가 되니 참기 힘들었다. 말해야 했다. 그래서 했다. "내가 그 얘기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또 하네?" 글자에서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모티콘 하나 없는 그 텍스트는 싸늘했을 것이다. 눈치 빠른 아기 엄마는 곧바로 "언니 미안해요" 하고 사과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야 했다.

그녀는 혹을 하나 추가했다. 자기 말이 실수가 아닌 동병상련의 마음에서 우러난 것인 듯 "언니 저도 마찬가지라서…"라며 두 번째 상해를 가한 것이다. 1년 4개월여간 유지하며 나름 전우애로 똘똘 뭉쳐있다 믿었던 사람들과의 카톡방에서 조용히 퇴장했다.

나는 측은지심이 강하고 이해심이 깊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말 함부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차가울 정도로 이해하기를 꺼린다. 사람의 약점을 가지고 여러 사람 앞에서 놀림감 삼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말 함부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상대 탓'을 한다. 농담(말하는 사람만 농담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에 상처받는 상대는 '잘 삐지고 속 좁은 사람', 외모 관련된 지적이나 놀림에 화내는 사람은 '콤플렉스 하나 극복하지 못하는 모자란 인간'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들보다 고단수가 있으니, 그 집단은 아무 말이나 던져놓고는 상대의 표정에 따라 처세 달리하기를 숨 쉬듯 한다. 상대가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면 "내가 그래서 그래"라던가, "나는 유머로 받아들이는데, 너는 왜 그렇게 꽁하게 받아들이냐?"는 식의 감정 컨트롤까지 하려 든다.

성인이라면 아니, 이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군가 들었을 때 마음 다치게 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장애인이 있는 자리에서 비장애인이 비장애인에게 "너 장애인이냐?" 하는 말은 그 말을 들은 이에게도 상처이지만, 옆자리 장애인에게는 충격이 될 수 있다.

'지잡대'라는 말은 명문대 나온 사람도 삼가야 할 말이다. 생각해 보라, 어딜 가던 명문대 나온 사람보다 소위 '지잡대'라 불리는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 더 많지 않은가. 지방대학을 지방대학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굳이 지방대학을 지잡대라고까지 폄훼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한 말이란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일베 언어'라는 것이 있다. 그들만의 리그와 같은 것인데 ‘일베’ 사이트 이용자들은 은어와 같이 자신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일베어'로 자신들의 눈 밖에 난 특정 집단에 언어폭력을 가한다.

말은 힘을 가졌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특히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저격하는 말은, 말의 단계가 있다면 아주 천박하고 상스러운, 욕들이 모여 사는 '저 깊은 바닥' 즈음에 있어야 그 위치가 적절할 것이다. 상처를 작정하고 하는 말은 모두 욕이기 때문이다. '모욕'.

보통 우리는 상처가 되는 말을 듣고도 '웃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 왔다. 쉽게 파르르 하지 말 것을 강요받아온 것인데, 심지어는 '화내면 진다', '시끄럽게 해봤자 좋을 것 없다'라는 말까지 만들어 무조건 참게끔 가르쳐 왔다. 그것은 정말 미덕일까?

나 역시 화내는 것이 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말을 못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모욕을 당해도 입을 다물어 왔다. 반성하건대 상대와 나 모두를 속이는 짓이었다. 상대도 위하고 나도 위하려면 "방금 네가 한 말은 옳지 않다", "그런 말은 누구한테도 해서는 안 된다"고 정확히 말해줬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아기 엄마 다섯이 모인 채팅방에서 나오기 전 나는 언어의 흉기를 휘둘렀던 그녀에게 "너에게도 콤플렉스인 그것이, 어째서 다른 사람에게는 놀림감이 될 수 있는지"를 물었어야 했다. 최소한 그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므로 어른답게 충고했어야 했다.

갑자기 TV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방송국 PD들에게 "어떤 프로그램이 좋은 프로그램인 것 같냐"라는 질문에 한 PD가 한 말. "(보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우리는 존경하는 어른이나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이나 인류에 공헌한 위인의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아이나 애완동물이나 여성에 대해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외모를 말한다. 높으신 회장님이나 힘 있는 직장 상사나 나이 지긋한 선생님에게 잘생겼다고 칭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랫사람, 만만한 사람, 얕잡아보는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외모 평가를 한다.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외모 평가는 본질적으로 사람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부가 상했다, 살이 쪘다, 얼굴이 핼쑥하다, 너무 말랐다 같은 말뿐 아니라 예쁘다, 동안이다, 글래머러스하다, 늘씬하다, 군살이 없다, 피부가 탱탱하다, 균형 잡힌 몸매다… 이 모든 말 또한 무례한 것이다.

-김지윤 작가, '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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