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와 가족 위한 '문화 공간' 문 열어

(팝콘뉴스=편슬기 기자) 사람을 '특정 개인'으로 규정짓는 요소는 무엇일까?

질문에 대해 혹자는 '이름’이나 '소속' 등 다양한 답안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바꿀 수 있고 소속 역시 마찬가지다. 태어난 국가와 성별마저 바꿀 수 있는 세상에 나를 규정하는 불변의 요소가 있을까?

명확한 답은 아닐지라도 질문에 대한 답에 가까운 것은 '기억'이 아닐까 싶다.

부모님 아래 자라온 기억이 나를 누군가의 '자녀'로 규정짓고, 학교에 다니며 동급생들과 친하게 지냈던 기억은 아무개의 '친구'로,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해 가정생활을 꾸리던 기억은 나를 '남편'으로 '아내'로 있게 한다.

삶을 통해 차곡차곡 쌓인 기억은 나를 나로서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이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초로기 치매 환자와 돌봄 가족


▲ 전국 최초로 치매 친화 영화관이 된 미림극장(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인천시와 인천광역치매센터는 지난 3월부터 치매 환자와 돌봄 가족을 위한 영화관의 문을 열었다.

90년대 활발한 영화 상영으로 각광받았으나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관에 밀려 이제는 추억 속의 공간으로 남은 '미림 극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치매 증상으로 문화 및 여가 생활이 여의치 않은 치매 당사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들을 위해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인천시가 '전국 최초'로 '치매 친화 영화관'을 마련한 것.

치매 친화라는 타이틀을 내건 만큼 영화 관람 분위기는 다른 영화관과 확연히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레 어두워지는 환경에 환자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적당한 밝기를 유지하고 뒷문을 열어둬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했다.

영화 상영 시각인 12시 30분이 가까워져 올수록 극장의 자리는 하나하나 채워져 갔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해 두 자리 당 한 칸씩 자리를 띄워 앉은 극장은 어느새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이들로 가득이었다.

영화 상영에 앞서 안내 영상에서는 치매 환자의 돌발 행동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곳이 비단 치매 환자와 가족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닌 모두가 방문할 수 있는 영화관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이날 극장에서는 초로기(65세 이전의 치매) 치매 환자인 아버지 조한진 씨와 그런 아버지를 돌보는 아들 조기현 씨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1포 10kg 100개의 생애'가 상영됐다.

영화는 아들이자 감독인 조기현 씨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새벽에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보니 한평생 미장을 해온 그는 '공사 현장'에 출근을 하겠다며 이제는 못쓰게 된 녹슨 도구들, 작업에 필요한 목장갑 등을 주섬주섬 챙겼다.

처음엔 그저 잠결에 그러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런 나날이 계속 반복됐다. 노환으로 더는 일을 나가지 않게 된 지 7년째 되던 어느 날이었다.

초로기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와의 기억을 남기고 싶어 제작한 영화는 그리 무겁지만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감독은 아버지가 가장 아버지답게 있을 수 있는,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다 30년을 공사 현장에서 '미장공'으로 근무했던 아버지의 직업을 떠올렸다. 그래서 부자는 벽돌을 쌓았다.

조기현 씨는 "아버지의 고유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벽돌'을 만지고 있는 순간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벽돌을 쌓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영화 제작 의도에 관해 설명했다.


치매 환자 돌봄 가족 '서로 공감하다'


▲ 감독과의 대화 중 조기현 감독이 무대 위에 앉아 있다(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 관객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감독과의 시간'이 마련됐다.

질문 마이크를 손에 쥔 이들의 첫 마디는 하나같이 "저도 치매를 앓고 있는..."으로 시작했다. 치매 가족을 돌보며 겪었던 고됨과 아픔이 이날만큼은 많은 이들에게 온전하게 공감받을 수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누구나 고개를 끄덕였고 얘기가 끝나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치매를 앓고 있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있거나 과거 돌본 경험이 있는 관객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응원의 소리이자 격려의 손짓이었다.

물론 영화를 촬영한 감독인 동시에 어린 나이에 아빠의 아빠가 된 조기현 씨를 향한 고마움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이날 영화와 감독과의 시간이 모두 끝난 후 출장 중 뇌출혈로 쓰러져 혈관성 치매 판정을 받은 정효근 씨(46)와 아내 이승연(46) 씨를 만날 수 있었다.

2010년, 업무차 중국 출장을 나가 있던 정효근 씨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한 1주일 동안은 쓰러지기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핸드폰을 사용하고 평소와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갑자기 쇼크가 왔다. 상황은 180도로 뒤바뀌었다. 오른쪽 몸은 마비됐고 인지능력은 세 살 수준으로 저하됐다.

이승연 씨는 그저 뇌출혈의 후유증이라고만 생각했다. 4년이 지나서야 처방 약에 치매 치료를 위한 약이 함께 처방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제야 남편 정효근 씨가 혈관성 치매라는 것을 알았다.

두 아이의 엄마였고 한 가정의 아내이자 이제는 가장과 돌보미 역할까지 짊어지게 된 이승연 씨는 병간호와 가정을 양립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최근의 어려움은 극과 극을 오가는 정효근 씨의 감정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탓에 버럭 화를 내다가도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남편과 달리 이승연 씨의 감정 변화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발생하는 시차가 괴롭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하하 호호 웃고 있는 남편. 치매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는 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연 씨는 치매 가족을 돌보는 가족들에게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하지 마라"고 조언한다.

물리적인 거리 등으로 멀리 떨어진 가족보다 곁의 이웃이 나을 때가 있다. 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조 모임 등을 통해 소통하면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승연 씨는 "자꾸 밖으로 나오고,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결되고 나면 그만큼 끈끈한 유대가 없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디든 문을 두드리고 조력자를 찾기를 바란다"며 응원의 말을 전했다.

기억은 사람을 특정 개인으로 규정 짓는다. 하지만 우리가 지닌 기억들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 기억을 공유했던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타인이 있다. 그들이 가진 나에 대한 기억은 언제까지고 유효하기에 우리는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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