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된 지적장애인시설 '샬롬의 집'…이별과 가까워지다

▲ 샬롬의 집 박기순 원장(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팝콘뉴스=박윤미 기자)* 울타리[fence]: 모든 사람이 가족과 이웃이 되는 이야기들.

대부분의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와 가정, 학교 같은 ‘사회적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간혹 울타리 없는, 누구보다 울타리가 필요한,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울타리를 걷어찬 이들도 있습니다. 코너 [울타리]는 그런 이웃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독자들의 관심이 그들에게 필요한 울타리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설한 코너입니다. 기사를 읽는 동안만큼은 마음의 울타리를 활짝 열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경석(가명)이가 죽었다고 전화했더니, 그 말 끝나자마자 누나라는 사람이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합디다. 자기는 꼴도 보기 싫다고. 전화로 사정사정해서 결국 병원에 오긴 했는데, 어째 표정이 슬퍼하는 게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 내다 버리는 사람 같더라고요. 그때 경석이가 죽은 것 이상의 큰 슬픔이 밀려와 한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26년을 함께 살았는데, 가족이죠. 그런데 우리는 장례를 치러줄 수가 없어요. 서류상 가족이 있으니까. 어떤 가족은 '아 그거 꼭 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라. 우리가 오히려 울면서 '빨리 오셔서 장례라도 치러주셔라' 하고 사정한다니까요. 죽어서까지 가족의 외면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슬퍼요. 누구는 죽어서 그 많은 화환과 조문을 받고, 누구는 그 흔한 꽃 한 송이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네.”

"내가 눈 감을 때 그랬어. '우리 다음 세상에는 건강한 몸뚱이 갖고 태어나자'고."

꿈 많은 십대 시절, 박기순 씨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다. 하늘과 바다 위를 마음껏 뛰어다니던 소년은 하루아침에 대소변 하나 스스로 처리 못 하는 반송장이 됐다. 그렇게 10년. 가족들의 눈물은 한숨이 됐고, 안타까워하던 이웃들은 끌끌 혀를 찼다.

어려운 형편 탓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온몸의 통증은 날 선 칼보다 더 예리하게 온몸을 그어댔다. 고통과 동침하는 날이 길어지면서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날 만들어 낸 그 생각은 결국 결심이 됐다. 그렇게 그는 자살을 시도했다.

죽지 않았다.

평생 누워 지낼 것이란 의사의 진단은 거짓말이 됐다. 걸을 수는 없지만, 상체를 일으켜 앉게 됐고, 휠체어만 있으면 불편하긴 해도 어디든 다닐 수 있게 됐다. 다시는 학교 근처에는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마음을 일으키자 이내 몸도 곧추서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금세 패스했다. 정신과 육체에 활기가 차올랐다. 쉰 넘어 다섯 시간 걸리는 대학에도 다녔다. 노력은 결실을 줬다. 사회복지사가 됐다. 졸업식, 비장애인들 앞에서 총장상까지 받았다.

이후에도 박 씨는 평생교육사, 보육교사, 대체의학 등 많은 분야의 전문자격증을 취득했다. 장애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일단 공부했다. 학식이 쌓인 덕분에 소속된 지역에서 장애인을 대표하는 여러 일을 맡을 수 있었다. 강서구장애인체육회에서는 야구분과 회장직을 맡았다. 머리에서 몸 쓰는(?) 일까지 그의 능력은 장애가 없었다.

극단의 선택까지 했던 그가 이처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와병 중 만난 특별한 인연에서 비롯됐다.

딸기를 따 누워있는 그의 입에 넣어주고 바깥세상 풍경을 이야기해 주던 사람. 박기순 씨보다 나이가 많은, 같은 장애가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어넣어 줬다. 죽긴 왜 죽냐고 했다. 덕분에 박 씨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서른여섯 나이에 꿈을 보다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공항동에 작은 터를 빌려 지적장애인 거주시설을 만든 것이다. '샬롬의 집'은 26년 전 그렇게 탄생했다. 누군가의 절망에서 희망을 거쳐.

▲ 샬롬의 집 전경(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불가능의 가능을 증명해 낸 후 박기순 원장에게 웬만한 고난과 시련은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일들이 되었다.

사단법인이 아닌 탓에 정부 보조금 한 푼 받지 못하고 20년 넘게 후원으로만 시설을 지탱할 때도(현재도 서울시나 정부 보조금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주변의 따가운 눈총과 손가락질을 받을 때도 "(내가) 노력하면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버텼다.

코로나19로 봉사자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후원이 줄어 쌀독이 비어 가는 지금의 상황도 언젠가 나아질 거라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있다.

열다섯 명 원생을 돌보는 일에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필요하다. 박봉으로 일하는 직원들의 급여까지 챙기려면 재정에 여력이 있어야 한다. 그 문제는 26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박기순 원장은 이 문제만큼은 지병처럼 달고 사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최근 결심이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박 원장은 인생 두 번째 장애를 입었노라 고백했다.

그것은 죽음이다.

최근 몇년 샬롬의 집 식구 몇이 질병이나 노환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박 원장은 말했다. 죽음은 얼굴을 모르는 이에게도 슬픈 일이다. 죽은 이의 가족들에게는 슬픔 이상의 것일 터. 하지만 박 원장의 상상은 공상이었다. 그가 마주한 원생들의 죽음은 일반인의 죽음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기이했고, 끔찍했다.

그들의 죽음은 그저 촛불을 훅하고 불어 끄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박 원장은 말했다. "한번은 가족이라는 사람이 뒤늦게 병원에 왔데요. 보통은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울잖아요. 그런데 곡소리는커녕 어디 잠깐 들렀다 가는 사람같이 하는데 그때 그 충격이 생각보다 오래가더라고요."

박 원장은 진짜 가족이 아니다. 그저 함께 오래 산, 가족보다 죽은 이를 더 잘 아는 그런 사람일 뿐인다. 그래서 그는 죽은 이의 장례를 대신 치를 수 없었다. 자격이 없었다. 무엇보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가족이 고인의 시신을 위임해야 한다. 그리고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위임장도, 장례비도 그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박 원장은 또 말했다. "죽음조차 외면하는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 가족 중 누군가는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데, 과연 가능한 일일까. 누가 이들을 책임질 것인가."

▲ 지적장애인시설 샬롬의 집. 중복장애인들도 입소해 있다.(사진=샬롬의 집) © 팝콘뉴스


박 원장은 장애인 자립 생활 지원 시스템과 샬롬의 집과 같은 시설들이 공존하며 함께 사각지대를 좁혀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무턱대고 탈시설화만을 외치는 작금의 분위기는 자칫 시설 전체를 암매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박 원장은 애원했다. "열악한 우리 같은 시설에 버려지다시피 한 장애인들의 죽음에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떠날 때마저 외롭고 쓸쓸한 인생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서울시 공영장례를 주관하는 나눔과 나눔 박진옥 상임이사에 따르면 무연고자가 되기까지 보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 기간 중 해당 지자체에서는 가족을 찾아 사망 소식을 전하고 시신 인수 의사를 묻는 공문을 발송한다. 이를 거부할 경우 죽은 이는 무연고자 신분으로 공영장례라도 치를 수 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시신이나 유골을 관리하는 자에게도 연고자 지위가 주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장례 절차에 드는 비용은 연고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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