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재판관' 프라이슬러가 떠오르는 이유

양승태 사법농단과 관련해서

홍선기 독일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입력 : 2018/09/10 [10:07]

▲ 독일정치경제연구소 홍선기 연구위원(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법학박사)     ©팝콘뉴스

(팝콘뉴스=홍선기 독일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독일에서 유학 중 우연히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나날들'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친하게 지내던 유학생 중 한 명이 권유해서 본 영화인데 놀랍게도 내가 공부한 프라이부르크와도 관련이 있는 영화였다.

 

영화 내용은 나치에 대항해 대학가에 전단지를 돌리던 숄 남매의 재판 과정을 다룬 소재였다.

 

소피와 한스 숄 남매가 가담하여 활동한 반 나치 결사체는 '백장미단'이었고 여기에 프라이부르크 학생도 함께했던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프라이부르크 대학 광장의 명칭도 '백장미 광장'으로 되어 있었고, 프라이부르크 시내 곳곳에 숄 남매를 기리기 위해 도로명이나 트램 정류장 명칭이 이들의 이름으로 돼 있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숄 남매는 나치가 저지른 만행을 법정에서 나열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강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에서 판사는 이들을 강하게 비난하고 훈계하면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고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이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도 놀랍게도 단두대형이었다. 법학 전공자로서 사형 판결 이후 단두대형으로, 그것도 수시간 내에 집행한다는 사실이 매우 당혹스럽기만 했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적 과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독일에서 정치범에게는 주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흉악범에게만 단두대형이 사용되었는데 히틀러 치하에서는 즉결재판으로 정치범에게도 단두대형이 엄청나게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단두대형은 사형이 폐지되는 1949년까지 유지되었는데, 집행방식도 단두대 날이 자신의 목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 엎드리지 않고 바로 누워서 집행 하는 방식이라고 하니 여간 잔인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냥 엎드려 얼굴을 밑으로 향하게 하는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이 영화에서 숄 남매에게 재판 도중 호통을 치고 극형을 선고하는 판사가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은 롤란트 프라이슬러라는 법관이다.

 

실존 인물로 백장미단 사건을 통해 반 나치 세력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일부러 먼 거리에서 이동해 이 재판을 주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사법부를 온전히 장악하지 못한 히틀러는 자신의 정적들에게 관대한(?) 판결이 내려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러시아의 인민재판을 모방하여 인민재판소를 설치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의 인민재판은 군중 선동을 통해서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이에 자신이 있던 나치는 인민재판소를 설치하여 단심제로 운영되는 즉결재판과, 판결 후 서너 시간 내의 신속한 처형으로 나치에 반대하는 자국민을 법의 이름으로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민재판소의 재판은 검사와 변호사의 역할이 거의 의미가 없었고, 사실상 법관 혼자서 모든 재판을 이끌어가는 막장 재판으로 알려져 있다.

 

나치는 6년간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하였다. 이는 전부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독일 국민이 당시 영국의 BBC방송을 들었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물론 전부 법을 근거로 한 것이다. 특히 '프라이슬러'는 야심 많은 법률가로 나치의 인민재판소장으로 임명되자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행위를 추적하고 응징하였다. 그러면서 독일민족공동체에 해가 되는 자라고 판단되는 모든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중병을 앓는 사람이나 장애인 및 유태인 등을 잡초로 비유하면서 이를 제거해야 다른 식물들이 잘 자란다는 논리로 무차별하게 법의 이름으로 자국민을 학살했다. 이런 그를 두고 '전체 독일 사법부에서 가장 음울하고 야만적이며 잔혹한 재판관'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는 1942년 인민재판소장으로 임명되면서 재임기간 동안 총 5,000여 건의 사형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프라이슬러 혼자서 무려 2,600여 건의 사형 판결을 내려, 당시 제3제국 재판관 중 가장 많은 사형 판결을 내린 '피의 재판관'이란 별명을 얻기에 이른다.

 

실제로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나치정부를 위해서라면 사형 판결을 남발해 같은 나치당 내에서도 프라이슬러에 대해 맹목적으로 나치에 대한 충성만을 생각하는 미치광이라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프라이슬러의 과거 행적을 보니 갑자기 지금 한창 논의되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떠올랐다.

 

그는 젊은 시절 박정희 정권에서 조작한 6건의 간첩조작 사건에서 재판을 주관해 유죄 판결을 내리고 12건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에 직접 관여하여 철저히 독재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후 그가 맡았던 사건들은 대부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하지만 당시 양승태 판사는 간첩조작 사건 등을 통해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가 결국 대법원장 자리까지 올라간 반면, 당시 재일교포 간첩조작 사건의 당사자였던 이원이 씨 같은 경우 불법 구금과 고문 휴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가 결국 대장암으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나치에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친 프라이슬러는 나치 제3제국의 법무장관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차관에서 멈추게 된다.

 

프라이슬러는 나치에 입당하기 전에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그를 믿지 않았고, 볼셰비키로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재임기간 상고법원 도입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가장 결정적 이유로는 상고법원 안이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키우는데 반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권은 축소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둘 다 그렇게 정권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려도 최고 권력의 신뢰는 얻지 못했다.   

 

양승태가 대법원장으로 근무하면서 저지른 행태를 보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일선 판사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허위 증빙 서류를 통해서 수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였으며, 정부와 재판 거래를 했다는 의혹과 국가 예산 횡령에 대한 단서가 포착되어 현재 검찰이 조사하고 있다. 그야말로 법관이 아닌 무슨 비밀정보기관의 수장이나 할 만한 일들이다.

 

'법비(法匪)'라는 말이 있다.

 

100여 년 전 일제 침략을 받던 중국에서 온갖 악법으로 중국 민중을 수탈한 일제 앞잡이 법률가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중국 민중은 일본 군경보다 법이라는 도구를 통해 '합법적'으로 자신들을 수탈하는 부역자를 더 증오했다. '검찰에 김기춘이 있다면 법원에는 양승태가 있다'는 말이 회자된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사법권을 흔든 법비를 비꼬는 말이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 아래서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김기춘은 단순히 반정부 유인물을 살포한 부산대학생들을 모두 24명이 관련된 대형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해 발표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양승태가 유죄 판결로 합법성을 마련해 주었다.

 

재미있게도 이들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하니 참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대법원에 서 있는 법의 여신 디케는 엄격함과 공평함을 상징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는 말이 있고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말이 있다.

 

양승태가 내린 판결로 우리는 양승태라는 판사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대법원장을 가진 우리 국민들이 그저 불쌍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프라이슬러의 최후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2월 프라이슬러는 대피 도중 피고인 서류를 가지러 베를린 법원 건물로 들어간다. 그때 마침 미군의 폭격이 법원에 명중해 건물이 붕괴되고, 여기서 프라이슬러는 사망하고 만다.

 

굳이 전범재판소까지 갈 필요도 없는 그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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