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43개 읍면동에서 국내 최초 추첨민주주의 실시

▲ 제주대학교 법학대학원 신용인 교수는 "헌법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마을자치, 더 나아가 마을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 박수인 기자

(팝콘뉴스=박수인 기자)정부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일자리 관련 예산에 총 54조 원을 투입했지만, 지난해 31만 명 수준을 유지하던 취업자 수 증가폭은 올해 2월 10만 명대로 추락하더니 7월엔 1만 명선까지 떨어졌다.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일자리 문제를 현장과 밀접한 읍면동 단위 지자체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예산을 내려보냈다면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제주대학교 법학대학원 신용인 교수는 “마을펀드를 만들어 지역내 청년 창업에 투자하고 수익금을 배당금으로 받고, 지역의 특성을 살린 일자리 정책을 펼치는 등 현장에 맞는 정책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며 “돈과 함께 권한을 주면 지자체에서 문제를 풀어갈 여지는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부산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재직하다가 2010년 제주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로 임명돼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제주특별자치도의 주민자치를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힘쓰는 신용인 교수를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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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화국은 어떤 의미일까?


파주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신용인 교수는 주민자치에 관심을 두게 된 배경을 묻는 기자에게 역으로 “민주공화국이 어떤 의미인 것 같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기자가 머뭇거리자 ‘민주’와 ‘공화’의 어원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며 “시민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모두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공화주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과두지배체제에 가깝다”며 “헌법에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돼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돼 있는데, 왜 현실은 그렇지 못할까 하는 의문에서 지방자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인구 5천만의 대한민국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이고, 평균 인구 22만 명의 시군구 단위에서도 대의민주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평균 인구 1만 5천 명의 읍면동에서 ‘민주공화국’의 본래 뜻에 맞는 ‘시민이 스스로를 통치한다’를 실현할 수 있지만, 읍면동에는 통치 권한이 없기에 하부 행정기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 교수는 주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법을 만들고 통치하는 ‘마을공화국’을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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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에서 실험 중인 추첨민주주의는?


▲ 제주특별자치도 43개 읍ㆍ면ㆍ동에서 추첨민주주의를 통해 마을자치 실험모델을 만들고 있는 신용인 교수. © 박수인 기자

사실 신 교수도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 것은 몇해 되지 않았다.

신 교수는 “법대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잘 가르쳐주지 않았고, 사법시험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교수로 가면서 그래도 명색이 교순데 공부를 좀 피상적으로 하지 말고 좀 더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 하면 할수록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적어도 읍ㆍ면ㆍ동이라는 단위에서 민주공화국을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읍ㆍ면ㆍ동 자치 현황을 살펴봤으나실망스러웠다는 것이다.

자치위원은 읍면동장이위촉하는 형태로, 비유하자면 임명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국회의원도 임명하는 식의 관치위원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2016년 지원자 중 추첨을 통해 자치위원을 뽑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러자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람도 나오지 않겠느냐’, ‘지역사회에서는 이 사람이 필요한데 추첨제면 못 뽑히면 어쩌나’ 등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주민자치학교를 수료한 이들만 자치위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조례를 통과시켰고, 대한민국 제1호로 추첨민주주의를 통해 제주특별자치도 43개 읍면동에서 추첨을 통해 주민자치위원을 뽑았다(추첨제 48%, 추천제 52%).

그렇게 선발된 자치위원회에서도 ‘아무런 권한도 없고, 마을 행사 때 동원만 시키는 게 무슨 자치냐’ 하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에 제주시에서 5개 읍면동 위원장, 서귀포시에서 5개 읍면동 위원장 그리고 외부 인사 2명(신용인 교수 포함)으로 구성된 제도 개선 TF팀을 꾸려 지난 4월 발족했다.

지난 7월 TF팀에서는 “정부가 마련한 협력형, 통합형, 주민주도형의 3가지 주민자치회 모델 중 하나를 제주지역 읍면동 주민에게 주민자치위원회 실시 모델로 선택하는 자치 조직권을 부여함으로써 주민자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제주특별법 개정을 추진해야 한다”며 특별법 개정을 제안했다.

신 교수는 “처음부터는 완벽할 순 없겠지만, 우리나라에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풀뿌리 자치단위에서 시행할 수 있는 첫 사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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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하느라 정치에 관심 갖기 힘든데?


(null)이쯤 되면 ‘주민자치 모델은 과연 효율적일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신 교수는 “만약 우리 동네에 도로가 깔리는 문제를 주민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주민자치에 권한을 주면 지역 주민들이 관심을 안 갖겠어요? 물론 그러면 더 시끄럽겠죠. 근데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거예요”라고 말했다.

현재는 중앙정부에서 내린 대다수의 정책을 지자체에서 하달 받아 추진하는 형태가 많은데, 모든 지역이 다 똑같아져서 위치적으로 편리하고, 이미 많은 인프라가 갖춰진 수도권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고도의 기술과 자본이 필요한 영역은 중앙에서 추진하더라도 육아나 교육, 노인복지 등 그 지역을 사는 주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인 정책들이 펼쳐진다면, 대한민국 전체가 더욱 경쟁력 있고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신 교수의 지론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시민들이 직접 법을 만들고 통치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생계를 위해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민주주의의 불만'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세세하게 짚어냈다(표지 이미지=동녁). ©박수인 기자

신용인 교수는 이러한 고민이 잘 나와 있는 책 마이클 센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을 소개하며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임금노동자와 노예노동자가 같냐 다르냐는 논쟁이 있었다”며 “시민들이 임금노동에 매이게 되면 사용주에게 종속돼 자치정신을 잃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어 “마을공화국과 기본소득은 쌍두마차”라며 “기본소득이 보장이 안 된 상황에서는 마을공화국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 페리클레스 시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기 힘드니까 하루 일당의 절반 수준으로 수당을 줬다고 한다.

신 교수는 주민자치회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참여수당을 준다면, 관심이 올라갈 것이라며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어디에 쓰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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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화국은 과연 실현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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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아픔과 독재의 역사를 겪으면서 ‘민주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왜곡해서 인식하거나 낯설게 받아들이는 국민들이 대다수인 현재, 대한민국에서 ‘마을공화국’이 가능할까?

신 교수는 “지금 바로 마을공화국 운동을 전개한다면, 100%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제도도 법률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상황”이라며 “또 마을에서 권력과 자본을 감시하고 빛을 비출 수 있는 마을 언론이 전국 단위의 네트워크로 형성돼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공화국에서는 다수가 꿈꾸면 꿈꾸는 대로 가게 돼 있으니 희망을 잃지 않고 민주공화국에 대한 성찰을 계속해 간다면, 대한민국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모든 국민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민자치, 더 나아가 마을공화국을 꿈꾸는 신 교수에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회의감을 느끼는 순간은 없는지 물었다.

“헌법을 처음 만든 임시정부가 꿈꿨던 것은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고문당하고 목숨까지 바치면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 자유로운 대한민국”이라며 “그들에 비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라며 웃음을 지었다.

끝으로 신 교수는 “우리 헌법의 최고 이념은 인간존엄”이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것이 헌법의 취지”라고 강조했다.

이어 “적어도 모든 인간이 생계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만드는 게 최우선 과제”라면서 “헌법이 꾸는 꿈, 그 꿈을 우리 모두가 같이 꾸고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놓고 보수와 진보가 대결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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