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뉴스=나소리 기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소설가의 꿈을 꾸던 중 신춘문예 당선을 마음에 두며 끄적여봤던 소설이다. 한 번의 시도 끝에 부끄럽고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워 덮어뒀지만 문득 주머니 속에서 손 끝에 잡힌 쪽지처럼 꺼내 돌려보고 싶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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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으로 들어온 여인은 자연스럽게 목장갑을 벗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 후 방 안에 들어와 침묵을 유지한다. 여인은 방금 전 담 위로 살짝 드러난 아이를 떠올린다. 땀에 젖어있던 얇은 머리카락과 조그맣게 숨어드는 아이의 목소리를 생각하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다시 집을 나선다.

마당으로 나온 여인은 아이의 화분이 있던 자리 앞에서 까치발을 들고 서 손으로 털어낸다. 볕에 말라붙어있던 얼마의 흙이 여인의 손에 털려 떨어진다. 높은 담벼락에서 떨어진 흙이 여인의 얼굴 위로 떨어진다. 여인이 흙을 털어내다 말고 뒷걸음질을 치며 얼굴의 흙을 털어낸다. 대충 얼굴의 흙을 털어내던 여인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담벼락 위를 노려보다가 이윽고 집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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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마당에 나와 올라온 풀이 있나 둘러보던 여인의 눈에 담벼락 위 화분이 들어왔다. 여인은 하늘을 보고 크게 한숨을 내쉰 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한참 화분을 노려본다. 이후 약간은 빠르고 큰 보폭으로 집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다시 마당으로 나온 여인의 손에 한 장의 포스트잇이 들려있다. 여인은 까치발을 들고 화분을 집어 내린다. 화분 속 나무토막에 돋아있는 작은 싹이 조금 커진 듯하다. 햇볕이 훑고 간 위쪽 잎은 제법 진한 녹빛을 띄고 있다. 여인은 잠시 싹에 눈길을 주다 이내 화분에 포스트잇을 붙여 다시 담벼락 위로 올려놓는다. 화분에 붙은 포스트잇이 바람에 다급한 소리를 내며 부르르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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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마당에 나와 하늘을 잠시 바라본다. 날이 흐린지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여인의 마당을 가로등만이 비추고 있다. 여인은 들고 나온 목장갑을 끼고 마당에 빼꼼 머리를 내민 작은 새싹들을 뽑아낸다. 여인이 화분에 포스트잇을 붙인 지도 사흘이 지났다. 아이는 더 이상 여인의 담벼락 위에 화분을 두지 않았다. 조금은 안도한 표정으로 여인이 담벼락 위를 바라보다 시선이 잠시 허공에 멈춘다. 아이의 화분이 버젓이 담벼락 위에 올려져있다.

여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는다.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화분을 바라보던 여인이 담벼락 위에서 화분을 내려 살핀다. 여인의 포스트잇은 없다. 여인은 가만히 화분을 노려보며 한참을 그대로 서있다 화분의 작은 새싹을 검지로 건드린다. 새싹이 튕기듯 여인의 손에서 잠시 흔들린다. 화분의 녹빛에 눈이 시려 여인은 화분을 다시 담벼락 위로 올린다. 여인은 제 자리에 서서 넓지 않은 마당에 듬성듬성 고개를 내민 풀들을 둘러본다. 다시 자리에 앉은 여인이 풀을 뽑기 시작한다. 풀을 뽑아내는 여인의 손이 조금은 더디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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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웅크리고 누워있던 여인이 살며시 눈을 뜬다. 커튼 너머 햇볕이 투과되며 섬유 사이사이를 뚫고 나온 빛이 여인의 얼굴을 간지럽힌다. 여인은 나태한 몸짓으로 기지개를 켠 뒤 거실 바닥에 대(大)자로 눕는다. 순간 돌끼리 부딪히는 덜그럭 소리에 여인이 숨을 죽이고 집중한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리에 여인이 잽싸게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나간다.

아니나 다를까 담벼락 너머로 그간 보이지 않던 화분과 함께 작은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여인은 빠르게 담벼락 밑으로 가 아이에게 짜증스럽게 소리친다.

“화분에 붙은 종이 못 봤어? 여기 올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
자신도 모르게 나온 오랜만의 큰 목소리에 여인이 움찔 놀란다. 담벼락 건너 아이는 말이 없다. 여인과 아이 사이에 담벼락과 화분만이 높게 쌓아 올려져있다.

“거기 있는 거 맞지? 아줌마 말 안 들리니? 내 말 안 들리냐고!”
여인이 조금 전보다 더 강한 어조로 또박또박 아이에게 말을 건넨다. 여인은 작은 아이를 다그치는 자신이 졸렬하다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론 속이 뻥 뚫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랜만에 목을 타고 넘어온 큰 목소리에 여인은 개운함을 느낀다. 잠시 후 아이의 풀죽은 목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온다.

“무슨 글씬지 몰라서요…. 근데 밟고 있던 돌이 부서져서 화분에 손이 안 닿는데요….”
여인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담벼락 가까이 다가가 몸을 붙이고 선다. 까치발을 들어 화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담 건너로 내려 보지만 아이의 손에 닿기는 역부족이다.

“조심히 떨어뜨릴테니까 잘 받아봐.”
여인이 말을 마친 뒤 들고 있던 화분을 담벼락 건너로 최대한 낮추고 조심히 손에서 떨어뜨린다. 화분이 여인의 손을 떠나자 아이의 작은 신음소리가 들린다. 여인은 귀를 기울여 아이의 움직임을 쫓는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아이는 감사하다는 말을 조그맣게 읊조린 뒤 뛰어간다. 아이의 발소리가 작아지자 여인은 화분이 있던 자리를 한참 바라보고 섰다. 여인이 말라 잔뜩 각질이 일어난 입술에 살살 침을 바른다.

여인은 방금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며 시원하다 느꼈던 졸렬한 자신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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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화분을 들고 계단을 내려간다. 집이 가까워지자 아이는 가만히 발소리를 죽이고 문 앞에 다가선다. 아이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자 한 여자가 아이를 흘긋 보고는 빨래를 마저 갠다.

“왔어?” 여자가 빨래에 눈을 고정시킨 채 아이에게 묻는다.
“응. 아빠는?” 아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이의 질문에 여자는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든다. 아이가 과장되게 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누난 언제 또 나가?” 좀 전보다 활기를 띈 아이가 여자에게 묻는다. 여자는 “내일 아침엔 가야지”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이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마음껏 어리광을 부린다. 이내 배고프다는 아이의 말에 여자는 일어나 달걀프라이와 간장을 넣고 밥을 비벼 아이에게 건넨다. 조촐한 끼니지만 아이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맛있게 밥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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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두 손으로 화분을 꽉 잡고 화분에 눈을 고정시킨 채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다. 조금은 쌀쌀한 바람에 아이의 얇은 옷이 제멋대로 팔락거린다. 방금 전 누나가 집을 나서며 만지작댔던 아이의 손에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다. 아이는 온기 가득한 손으로 화분을 잡고 여인의 담벼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내 아이의 눈앞에 여인의 담벼락이 들어오고 아이는 주춤거린다.

아이가 담벼락 밑에서 한참을 망설이며 신발 밑 깔린 모래들을 '드르륵 드르륵' 발로 밟아 짓이긴다. 순간 담벼락 너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또 너니?” 여인의 날이 선 목소리에 아이가 흠칫 놀란다.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한참을 머문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여인이었다.

“이런 걸로 입씨름 하는 것도 너무 황당해서 우습네. 화분 놓을 곳이 우리 집밖에 없니?” 여인의 물음에 아이는 입을 다물고 화분만 만지작댄다. 아이의 대답을 기다리던 여인이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뒤돌아 현관 쪽으로 걸어간다.

“아줌마가 이 동네에선 제일 행복하니까요.” 아이의 기죽은 대답을 들은 여인은 불뚝 화가 솟구침을 느꼈다.
'행복하니까요? 말 같지도 않은 저딴 기준은 누가 세운거지? 왜 여기에 화분 놓냐는 질문에 '행복하니까요'? 저게 진짜…' 여인은 분노를 속으로 삼키고 현관문을 쾅 닫는 것으로 감정을 표출한다. 여인이 문 닫는 소리가 들린 뒤에도 아이는 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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