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뉴스=나소리 기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소설가의 꿈을 꾸던 중 신춘문예 당선을 마음에 두며 끄적여봤던 소설이다. 한 번의 시도 끝에 부끄럽고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워 덮어뒀지만 문득 주머니 속에서 손 끝에 잡힌 쪽지처럼 꺼내 돌려보고 싶다. <편집자주>

1

회색 돌로 쌓아 올린 정갈한 담벼락. 잡풀이 들어가 앉을 법도 한데, 어쩐지 회색 벽은 그럴 틈도 주지 않는다. 단독주택이라면 흔히 볼 수 있을만한 감나무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회색 돌담 위에도 따가운 가을볕은 내리고 있다.

그 투박하고 딱딱한 돌담 아래에서 아이가 한참을 낑낑대고 있다. 7살쯤 돼 보이는 아이의 발밑으로 엉성하게 쌓인 돌들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아이의 손에는 돌담만큼이나 투박한 나무 조각 같은 것이 화분에 담겨 들려있다. 아이는 그것을 돌담 위에 올려놓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힘껏 든 까치발이 눈에 띄게 부들거리고 이내 그 돌들과 함께 아이의 작은 몸이 무너졌다.

조금 전, 서툴게 쌓아 올린 돌들과 함께 무너지면서도 아이는 화분을 가슴 앞으로 꼭 끌어안았다. 작은 탄식과 함께 오른쪽 팔을 들어 팔꿈치를 살피며 상처가 있는지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높디높은 돌담 위를 쳐다보며 팔꿈치를 왼쪽 손으로 비볐다. 이내 들고 있던 화분을 살폈지만 나무토막에 조그맣게 나있던 싹들 중 하나가 부러져있었다. 부러진 싹을 본 아이는 큰 실망감에 곧 울듯이 입을 삐쭉거렸다. 하지만 곧 멀쩡한 싹들을 본 후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아이는 담벼락 위를 올려보며 큰 한숨을 쉰 후 다시 한 번 돌들을 쌓는다. 이번에는 크고 넓적한 돌부터 아래에 차곡차곡 쌓는다. 그렇게 세 개의 돌을 쌓다가 이내 한 쪽 발로 그 돌을 꾹꾹 밟아본다. 그리고는 빠른 몸놀림으로 돌을 밟고 담벼락 위에 그것을 놓았다. 아이의 표정이 환해지는 순간 돌들은 또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돌담 위에서 가을볕을 쬐고 있는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아이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런 뒤 곧장 어딘가로 뛰어갔다.

2

시계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집 안. 천장에 붙어있는 여러 개의 형광등은 제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따가운 가을볕은 그 어디로도 들어올 수 없게 온 집안이 커튼으로 막혀 있다. 집 안 곳곳 푸른빛의 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지만 그것들 역시 생명 없는 조화들이다. 모든 생명들의 숨이 멎어있는 이 집 가운데 앙상히 마른 중년의 여인이 무릎을 껴안고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적막만이 집안의 공기를 가득 메운다.

그 때, 밖에서 들리는 어린 아이의 비명이 순식간에 집안의 적막을 부순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에 여인의 불안한 눈빛이 커튼 뒤를 향한다. 곧이어 다시 달그락 달그락 돌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인은 조용하고 느리게 마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주 조금 커튼을 열어젖힌다.

어둡고 칙칙한 적막 사이로 한 줄기 가을볕이 스며든다. 그 볕 사이로 반짝이는 먼지들이 둥둥 떠다닌다. 먼지 너머 돌담 위로 움직이는 나무 조각이 여인의 시야에 들어온다. 나무 조각을 담은 화분의 양 옆으로 가느다란 아이의 손이 꼬물거린다. 이내 여인의 담벼락 위에 서툴게나마 화분이 놓이자 또 와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작고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여인의 죽어있는 퀭한 눈은 잠시나마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하지만 이내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반짝이던 눈빛 역시 서서히 죽어간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커튼은 닫힌다.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던 햇빛이 점차 붉어지며 이내 소멸한다. 웅크리고 있던 여인은 조심스런 몸동작으로 일어나 카디건을 걸친다. 그리고는 신발장 위에 놓여있던 목장갑을 들고 문 밖으로 나선다. 밖은 침침한 가로등 빛으로 가득 차있다. 하루종일 빛을 마주하지 못한 여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그리고는 벽 가까운 곳에 주저앉아 돌 틈 사이로 난 풀들을 뽑았다. 여인의 집 어디에도 푸른 풀은 없었다. 회색 시멘트와 흑갈빛 흙만이 가득하다. 여인은 자신의 이마에 땀이 맺힌 줄도 모르고 푸른빛을 내는 작고 연약한 그들을 모조리 뽑아버린다.

여인의 엉덩이 옆으로 뿌리가 드러난 풀들이 조금 쌓일 즈음 담벼락 뒤로 조그맣게 아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여인은 놀라 순간 손을 멈춘다. 아이의 작고 날렵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내 아까 낮에 들렸던 돌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한참 들린다. 낑낑대는 아이의 신음소리가 한참 들려왔지만 여인은 멈춘 채 움직일 줄 몰랐다. 그 때 흙과 신발바닥이 닿아 비벼지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림과 동시에 아이의 기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담 뒤로 아이의 얼굴이 쑤욱 올라왔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3

컴컴하고 좁은 원룸 방 안에 아이가 있다. 지하방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은 없다. 흉하게 머리가 숭덩숭덩 빠진 인형 두 개가 낡은 화장대에 가지런히 앉아있고 방 가운데 아이가 벌러덩 드러누워 있다. 밖에서 컹컹 짖는 개소리가 들리자 아이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잽싸게 시계를 확인한다. 시계는 저녁 8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창문을 흘깃 보지만 밖이 보이지 않는 지하 방의 창문은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이는 눈을 비비적대며 자리에서 냉큼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밖은 어두웠다. 아이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의지하며 빠르게 달렸다. 아이의 걸음이 점점 늦춰지더니 이내 가쁜 숨소리를 내며 아이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까 낮에 보았던 돌담이 가까워지자 아이의 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따가운 가을볕에 달궈졌던 돌담도 싸늘히 식은 채 차가운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있다. 아이는 돌담 아래 서서 담장 위에 놓인 화분을 올려다본다. 주위에 흩어진 돌을 주워 모으지만 낮에 쌓아올렸던 넓적한 돌들은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던 아이는 이내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최대한 무릎을 굽혔다 있는 힘껏 뛰어오른다. 하지만 아이의 손은 화분에 닿지 않는다. 결국 아이는 부서진 콘크리트 벽돌을 주워와 그 위에서 아슬아슬 뛰어오른다. 이내 아이가 높이 뛰어오르고 벽 너머 중년의 여인과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시선이 닿는다.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은 여인과 눈이 마주친 아이가 순간 숨을 들이마신다.

4

여인과 아이는 높은 돌담을 사이에 두고 한참을 침묵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여인에게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여인은 마당에 쪼그려 앉은 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벽 뒤에 아이가 있을 곳을 상상하는듯 그 지점을 가만히 쳐다본다. 아이는 동그랗게 생긴 눈으로 한참 담장 너머를 바라본다. 한참의 침묵 속, 여인이 먼저 일어나 천천히 집을 향해 걸어간다. 풀이 짓이겨지는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가득 채운다. 여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아이의 두 손이 초조한 듯 꼼질거린다. 이내 여인이 집 안에 들어가 문을 닫자 아이는 이내 자신이 온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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