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도시인 일상 소설] 탈피(脫皮) 4-2

나소리 기자 | 입력 : 2016/03/15 [17:33]
(팝콘뉴스=나소리 기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소설가의 꿈을 꾸던 중 신춘문예 당선을 마음에 두며 끄적여봤던 소설이다. 한 번의 시도 끝에 부끄럽고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워 덮어뒀지만 문득 주머니 속에서 손 끝에 잡힌 쪽지처럼 꺼내 돌려보고 싶다. <편집자주>

                                                               5

크고 높은 건물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녀가 우르르 빠져나온다. 
“무슨 질문 나왔어? 나는 심사위원이 압박질문해서 어리바리하게 있다가 나왔잖아.”
“난 그래도 나름대로 무난했어. 뭐, 근데 이건 내 생각이고….”

단정하게 머리를 올려 묶은 여자 둘이 애린 옆을 지나가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그 옆에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를 망으로 고정시킨 애린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건물에서 나온다.
“응……. 별 질문 안 했어. 아니야. 외웠던 데에서 질문도 나왔어. 엄마,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지금 너무 피곤하다. 네.”

통화를 마친 애린이 건물 앞 버스정류장을 향해 천천히 걷는다. 곧 버스가 도착하자 애린이 사람들 틈에 섞여 버스를 탄다. 버스 안은 이미 만원이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애린은 이어폰으로 귀를 막는다. 애린은 이어폰을 통해 나오는 노랫소리에 한결 머리가 편안해짐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내 애린은 방금 전 면접시험장 안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심사위원이 애린에게 질문을 건네는 순간 애린은 자신의 머릿속이 텅 비어버림을 느꼈다. 
‘분명 어제 밤에 외웠던 예상문제 중 하나였는데…….’ 라는 생각만 머릿속에서 맴돌 뿐 애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더듬기도 하고 생각하느라 한참의 적막이 흐르기도 했던 애린의 면접시험은 듣지 않아도 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애린은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책가방을 맨 공무원 수험생들이 저마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힘 빠진 애린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고시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고시원 앞에 다다르자 그 옆 문구점이 보였다. 문구점 문 위쪽에는 ‘담배’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슈퍼까지 가려면 두 골목을 지나야 해 애린은 담배를 살 때 종종 문구점을 이용하고는 했다. 문구점 앞 뽑기 기계에는 여러 아이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아이들은 연신 비명을 질러대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돈을 넣고 기계를 돌려댔다. 그 모습을 흘깃 보던 애린이 문구점 안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담배를 달라고 하며 지갑을 열었다. 그 때 계산대 앞에 있는 ‘소라게 기르기’라는 서툰 글씨가 보였다. 애린은 무심하게 여러 플라스틱 통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밖에 다리와 얼굴을 꺼내고 먹이를 먹던 소라게가 숨어버렸다. 애린의 눈에는 소라껍데기밖에 보이지 않았다. 애린이 살짝 흔들어 봐도 소라게는 숨어서 나올 줄을 몰랐다. 그런 소라게를 애린은 한참 바라봤다. 이내 문구점에서 나온 애린의 손에 소라게가 든 플라스틱 통과 담배가 들려 있었다.

                                                              6

“희원 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른하게 졸던 희원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파티션 너머로 선배가 자신을 향해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다. 그는 선배에게 간단한 업무지시를 받은 후 자리로 돌아와 재빠른 손놀림으로 문서를 작성해나간다. 그 때 입사 동기인 재호가 희원의 옆으로 와 오늘 술 한 잔 하자는 신호를 보낸다. 희원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자 재호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돌아선다. 키보드 위에서 계속 움직이던 희원의 손이 잠시 멈춘다. 모니터를 빤히 응시하던 그는 이내 책상 서랍을 열어 허쉬 초콜릿을 꺼내 입 안에 넣는다. 달콤한 허쉬 초콜릿이 혀 위에서 사르르 녹는다.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던 희원은 기지개를 켠 뒤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간다. 잠시 후, 회사건물 밑 1층 화단 앞에 희원이 담배를 피우며 서있다. 오늘따라 거리가 한적하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화단 옆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담배를 입에 물고 예전에 몇 번 마주쳤던 그녀가 부르던 콧노래를 흥얼댄다. 그 때 누가 옆에 털썩 가방을 내려놓은 뒤 앉는다. 콧노래를 멈춘 희원이 옆을 흘깃 보는데 그 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다. 방금까지 콧노래를 흥얼대던 희원이 쑥스러운 마음에 급히 담배를 끄고 일어나려는데 그녀가 희원을 부른다. 

“저기요. 불 있어요?”
청바지에 운동화, 백팩 그리고 한쪽으로 높게 올려 묶은 머리까지. 너무나 앳돼 보이는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첫 마디라고 생각하며 희원은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내민다. 그녀가 라이터를 받아 들고는 담배를 물어 불을 붙인다. 그녀가 물고 있는 담배에서 뿜어지는 흰 연기가 그의 얼굴에 닿는다. 그녀는 라이터를 돌려주며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의 표시를 건넨다. 라이터를 받아들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희원을 한 번 쳐다본 뒤 애린은 아직 다 타지 않은 담배를 끄고는 자리를 떠난다. 희원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고는 자신도 일어나 회사 건물로 들어간다.

                                                            7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희원은 어제 회식 때 한 과음으로 요의를 느껴 평소보다 이르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침대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었다. 잠시 고민하던 희원은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이내 희원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출근시간에 임박해서였다. 희원이 다급하게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옷을 입고 집을 나선다. 회사 근처에 집을 얻은 덕에 많이 늦지는 않겠지만 평소 지각을 하지 않던 그는 늦잠을 잔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럽다. 재빨리 걸음을 재촉하는데 오늘도 벤치에 그녀가 앉아있다. 희원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과 손가락으로 향한다. 그녀의 입과 손에는 담배가 없다. 살짝 그녀와 그의 눈이 맞닿는다. 희원은 그녀의 눈길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회사 건물로 들어간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애린이 가만히 바라본다. 그녀의 입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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