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뉴스=서명준 박사)

'독일 정치 경제 이야기'는 독일의 정치, 경제, 법률, 사회 등을 연구한 전문 인력들이 만든 독일정치경제연구소에서 우리의 현실과 접목해 사회적 공감대 확산과 발전을 고민하고 제안하는 칼럼이다. 다만, 경우에 따라 <팝콘뉴스>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편집자 주>

내년 총선을 목전에 두고 있는 정치권의 거부할 수 없는 화두는 '미디어선거'다. SNS와 같은 소셜미디어가 새로운 정치 도구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TV 방송의 힘도 여전히 막강하다. 그렇다 보니 정치 지망생들에게 미디어선거를 대비해야 한다는 컨설팅이 환영을 받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을 비롯한 많은 단체의 조사연구들이 언론의 역할이 크니 선거 승리를 위해서라면 이를 잘 활용하라는 주장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의 관심은 SNS든 방송이든 미디어선거가 하나의 큰 흐름이라면 그것이 정말 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냐에 있을지 모른다.

여기 독일의 미디어선거를 잠시 들여다 보면 다소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리더십에 대한 찬사가 많지만, 지난 2009년 총선 당시 그녀가 보여준 TV 토론은 미안하게도 별 내용이 없는 매우 싱거운 것이었다.

정치적 입장에서 뚜렷하게 대비되지 않는 메르켈과 슈타인마이어 총리 후보는 선거기간 내내 서로 비슷한 내용으로 일관했고, 결국 방송토론에서마저 대결을 회피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해 9월 몇차례 있었던 TV 후보자토론은 방송이 시작되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곧바로 지루함이 느껴졌다.

당시 좌파당의 약진을 제외하면 총선 자체가 독일 선거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논쟁이 없었던 한마디로 김빠진 선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독일은 치열한 정치사회적 논쟁 속에서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여러 중대 사안들을 안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 심각한 경제위기의 극복, 미래 에너지 개발 문제, 교육과 의료보험 시스템 개선 등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러니까 막강한 사회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유럽 경제의 견인차라는 자만감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메르켈과 슈타인마이어 후보는 이런 민감한 사안들을 적당히 피해 가는 노련함(?!)을 보였는데, 스핀닥터(spindoctor)와 베를린 주재 정치부 기자들의 지도편달에 충성하는 모습이었다. 미디어가 오히려 정치 논쟁을 가로막았다는 평가가 가능한 대목이다.

▲ ⓒ주한 독일대사관 발행 잡지 표지 일부
당시 정당의 미디어전략가와 언론의 가르침은 이랬다.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화합과 평화이지 논쟁과 비판이 아니라는 것. 심각한 논쟁보다는 한때 히틀러 독재에 대항하던 '민주대연합'류의 기억을 되살려 화합에 '올인'해야 한다는 지도편달의 말씀이다.

사정이 이러니 전통적인 중도좌파 성향의 사민당과 보수우파 기민당의 양대 후보인 슈타인마이어와 메르켈은 언론 앞에만 서면 마치 오래된 연인이나 심지어 부부처럼 다정해 보였다.

영화 <스타워즈>에서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숙명적인 결투처럼 날선 비판과 정책 대결이 오가는 멋진 한판 승부를 기대했던 유권자들은 실망했다.

양 후보 간 의견 차이는 올 여름 휴가 행선지가 바다인지 산인지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수준으로 전락하면서 TV토론 내용이 한 TV방송 연예프로그램 <우결(우리 결혼했어요)>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여러 패널들의 질문에 슈타인마이어 후보가 다소 유리했던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최저임금제 등 사회복지정책의 경우, 슈타인마이어가 사민당 후보로서 당의 입장과 큰 마찰이 없는 인물이라면, 메르켈은 기민당이 친기업 성향의 보수정당이어서 마음 편하게 복지확대를 주장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메르켈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도사라는 이미지를 벗고 독일식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겠다는, 보수파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변절'을 감행하고 있어서 당의 외면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TV토론은 슈타인마이어의 화려한 언변이 돋보였고, 메르켈이 실수만 하지 않으려는 소극적 모습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메르켈은 다시 총리가 됐다.

정치인이 '미디어 트레이닝'에 쏟아 붇는 시간이 늘고 정치마케팅이 논쟁보다 힘을 얻고 있다.
과거 헬무트 콜(기민당)과 빌리 브란트(사민당) 전 총리들만 해도 가히 논쟁의 달인들이었는데, '총리논쟁'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더구나 브란트는 거짓을 말하는 상대 후보에게 거침없이 호통치는 정치인으로 유명했고, 그의 포효하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유권자의 표심으로 이어졌다.

이제 미디어선거의 시대가 정말 도래했다면, 권력 획득에 관심 있는 정치 지망생들은 오히려 이런 거침없는 비판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오늘 정치마케팅의 시대에 선거'전(戰)'은 선거'마케팅'으로 변하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치열한 정책 결투가 결여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하나의 마케팅시장을 창출했다는 화려한 분석들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심화되고 있는 정치마케팅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독일 TV토론이 일례를 보여준 셈이다.

정책 대결을 회피하고 현란한 말잔치로 일관하려는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맡겨도 될 것인가. 우리는 독일보다 사정이 나은가라는 반문을 던져본다.


칼럼니스트 - 독일정치경제연구소 서명준 위원(베를린 자유대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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